라이킷 16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골 러너는 차키를 챙긴다

[양평 사람 최승선 046] 사실 러닝이 진짜 비싼 취미라더니

by 최승선 Feb 15. 2025
아래로
undefined
undefined


예능 프로그램 <서울 체크인>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이다. 서울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곳이라 신기하다던 효리 언니의 감상. 2022년 5월 당시, 나는 종종 인천에서 양평을 왕복 7시간에 걸려 이동하던 뚜벅이다. 차로 왕복 3시간이면 될 길을 차가 없어서 2배나 더 이동했다. 그러니 이상했다. '나는 양평에서도 많이 걷는데? 내 친구들도 산책 좋아하는데?' 모두 뚜벅이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뚜벅이 시절엔 취미가 산책이었다. 양평 시내에서 이것저것 하고 나면 결론은 '갈산공원 갈래?'였다. 시내에서 도보 10분은 족히 떨어져 있는 갈산공원 입구까지 걸어가 컨디션이 좋은 날엔 30분 거리의 농구장까지, 너무 많이 걸은 날엔 20분 거리의 반환점까지 걸었다. 


사실 공원에 가지 않아도 산책은 충분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10분. 정류장에서 역까지 또 10분. 대학에서 역까지 30분. 기본적으로 10분은 '요 앞' 정도의 감각이 생기는 활동 반경이었다. 세상에 산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3걸음 이상 걷지 않는다는 '3보 이상 탑승'이 삶의 규칙인 사람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1km까지는 설렁 걷는 거리, 1.5km까지는 기분 좋으면 걷는 거리가 아니라니.


하루는 9시 막차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 집에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 오던 차는 속도를 줄여 내 옆에 멈췄다. '승선이니? 태워줄게' 앞집 아저씨였다. "이 시간에 걸어 다니는 사람 이 마을에 너밖에 없어"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네? 그럼 다들 어떻게 살고 계신 거죠? 운전을 못하는 어르신들은 해 떨어지기 전에 모든 외출을 마치셨고, 그 외 모든 어른들은 운전을 했고,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가족들이 데리러 갔다. 나만이 가로등만 드문드문 있는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차가 생긴 후에야 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가 갔다. '마을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효리 언니도, 3보 이상 탑승한다는 사람들도, 도보 10분 거리도 차키를 챙기는 사람들도, 야밤에 걷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던 앞집 아저씨도. 핸드폰 없이, 지갑 없이 외출할 순 있어도 차키 없이 외출할 순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모습이 약간 멋이 없어, 버스를 타보려고 시도했으나 비효율적인 동선과 하루 6대 있는 노선 이슈로 멋없이 살게 됐다.


이 경험은 러닝을 다시 시작하면서 낯설어졌다. 인천 친구 덕에 어쩌다 보니 3년째 10km 달리기 대회를 나가게 됐는데, 양평에서는 러닝을 할 때도 차키를 챙겨야 했다. 2년 전, 양평 친구와 약속을 잡고 러닝을 할 때 나는 집에서 1km 떨어져 있는 상동 호수공원에서 달리기를 한다고 했더니 부럽다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는 차가 없어서 밤에 달리기를 할 수 없고, 집 앞에 산책로가 있지만 가로등이 없으니 무서워서 뛸 수 없다고 했다.


그 친구와 러닝을 할 때는 내가 차를 끌고 친구네 집에 갔다. 그리고 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강을 따라 달린다. 시야는 산책로 옆 마을에서 번져오는 빛만큼, 그날의 달 밝기만큼 허용된다. 5km 코스의 반환점에 가면 가로등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둘이니 용감하게, 그러나 아무도 이 길에 없길 바라며 달려야 했다. 해가 밝으면 버스를 타고 러닝을 하러 갔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러닝에 적합한 복장은 대중교통 이용에 적합하지 않으며, 러닝이 끝난 몰골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어제는 처음으로 운동장의 트랙을 달렸다. 차로 4분, 도보 30분 거리의 운동장이다. 봄, 가을이면 걸어갔겠지만, 어쩌면 여름이어도 걸어갔겠지만 차마 겨울엔 걸어갈 수 없는 거리였으므로 차키를 챙겼다. 가는 동안 워밍업을 전혀 하지 못한 채로, 핸들 열선과 좌석 열선만 가까스로 워밍업 됐을 때쯤 운동장에 도착했다. 밤 9시에 가니 한산했다. 트랙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 5명쯤? 이내 모두 사라지고 나와 다른 베테랑 러너 둘만 남았다.


깨끗하고, 조명도 잘 들어오고, 관리도 잘 된 트랙이었다. 상동호수공원은 밤 12시에 가도 달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달리기 좋은 시간대에 가면 사람들이 많아 정신 사나울 정도였는데 밤 9시에 이토록 한산하다니. 패딩을 차에 두고, 차키는 차 인근에 숨겨두고 러닝을 시작했다. 달리면서도 5km 완주를 할 수 있을까, 3km만 뛸까 고민을 하던 도중 갑자기 불이 꺼졌다. 모든 불이 일시에, 꺼졌다.


시간을 보니 10시다. 10시 이후로는 운동을 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운동을 하지 말라고 판단한 건지 불이 꺼졌다. 먼저 달리고 있던 베테랑 러너가 나를 추월해 준 덕에 계속 달릴 수 있었다. 10시가 넘는다고 문을 잠그지는 않겠구나, 안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트랙에 걸어서, 달려서 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했다. 운동장 근처에 빌라가 몇 개나 있나. 그 빌라들도 걸어서 20분쯤 걸리려나. 


대학생 때, 이포보에서 산책하겠다며 친구를 꼬셔 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다. 집 가는 노선 막차를 타고 집을 지나쳐 이포보에서 내려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가로등이 없었다. 겁 많은 친구에게 '곧 가로등이 나타나겠지. 여기 4대강 사업한다고 돈을 얼마나 부었는데, 곧 있을 거야. 쫄지 말고 걸어'라고 용기를 주었다. 가로등은 나타나지 않았고, 어느 마당의 개는 성실하게 짖었고, 친구는 울 뻔했고, 나는 미안했다. 1시간을 걸어 공원이 나타나니 그제야 빛이 있었다. 그 길에 가로등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없다. 


성남에서, 인천에서는 1km를 걸어가면 새벽 3시에도 가로등이 켜져 있는 공원에 갈 수 있었는데 양평에선 차를 타고 가도 밤 10시면 있는 가로등도 꺼버린다. 비단 그 운동장뿐만이 아니다. 양평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할 공원인 갈산공원도 새벽 2시쯤이면 소등한다. 러닝이 비싼 취미라더니. 부동산이 좋거나, 아니면 최소 차라도 있거나, 그것도 없으면 헬스장이 가장 싸게 먹힐 동네가 있는 것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매거진의 이전글 시골 사람의 텃세에 관한 변명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