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람 최승선 045] 영화 <허니랜드>가 준 뜻밖의 교훈
대학원에서 필드트립으로 거제도에 갔다. 호텔의 지역 공헌 방향에 대한 연구가 주요 주제였는데, 호텔 서비스 중 야외 영화 감상 시간이 있었다. 바다 앞에 있는 호텔, 그 테라스에 빈백과 의자를 깔아두고 영화를 봤다. 전주 국제영화제 프로그램 기획자가 큐레이션한 영화들을 틀어준다 할 때부터 알았다. 오늘 우리가 볼 영화를 보고 웃을 일은 없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다큐였다. 산비탈에 사는 50대 여자의 이야기. 허허벌판에 집 한 채만 달랑 있는 곳에서 노모를 모시고 사는 그 여자는 한참을 걸어 산비탈에 올라 꿀을 채집하고, 또 한참을 걸어 마케도니아 시내로 나가 꿀 몇 병을 팔고 바나나 몇 개를 산다. 한참을 걸어 집에 들어온다. 한참을 걷는다, 영화에서 지루할 정도로 걷기만 한다는 뜻이다. 풍경이 바뀌어도, 몇 개의 씬이 지나가도 여자는 걷는다.
이 지루해보이는 영화에서 나는 큰 감정의 동요와 함께 시골 사람들의 텃세를 이해하게 됐다. 가능하다면 영화를 다 보고 이 글을 읽기를 권하지만, 다 읽고 영화를 봐도 괜찮다. 그럼 본격적으로 영화 얘기 시작.
'끝날 때까지 걷나..?' 생각이 들만큼 조용한 영화에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허허벌판에 집 한 채 달랑 있었으니 마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 마을에, 여자의 옆집에 승합차 한 대가 들어온다. 애가 4명이나 되는 가족이 이사를 왔다. 씬이 바뀐다. 승합차와 아이들이 소떼를 몰고 온다. 자동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소들의 울음 소리, 소들을 호령하는 아이들의 소리로 소란해진 풍경을 '원주민' 여자가 바라본다.
가족이 나타나기 전까진 엄마에게 '밥 드세요', 시장 상인에게 '돈을 좀 더 줄 수는 없나요?' 외에 말 할 일 없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옆집 아이들이 쳐들어간다. 그 집의 강아지에 대한 호기심이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예의보다 앞섰던 것이다. 옆집 아줌마에게 거리낌 없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 어린이들에게 아줌마는 꼼짝없이 곁을 내준다.
아이들을 통해 대화를 트게 된 옆집 아빠는 이 '광야'의 삶에 익숙한 원주민 여자에게 삶의 노하우들을 묻는다. 예를 들면 양봉을 어떻게 하는지. 여자는 아는 내용들을 말해준다. "꿀을 채밀할 때는 절반 정도는 남겨야 해요. 꿀이 없으면 벌들이 다 떠나요." 당연하게도 옆집 아빠는 욕심에 꿀을 전부 채밀해 팔아 넘기고, 먹을 게 없는 벌들은 옆 별집으로 넘어가 전멸한다. 그 벌집에 살던 벌들까지도.
예고 없이 요란하게 왔던 가족들은 예고 없이 요란하게 떠난다. 몰고 왔던 소떼들이 죽고 나서, 새 터전을 찾아 떠난다. 가족의 입장을 보던 여자는 그들의 퇴장을 지켜본다. 가족이 모두 떠난 후, 영화는 다시 고요해진다. 여자는 함께 웃을 사람이 없어졌고, 집에 키우던 벌들도 죽었다.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한참을 걸으면 됐던 자연의 벌집도 가족에 의해 사라진다. 여전히 남아있는 건 개 한 마리뿐. 그 개와 여자는 한참을 걸으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여자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은 여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기 전, 오직 가족의 입장만으로도 긴장을 느낄 수 있다. 이상한 일이다. 그 가족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벌써 싫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는 새로운 이웃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럭저럭 삶을 살고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생겨버린 일상의 변화는 달갑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떠날 곳 있는 자들이 이것저것 우당탕탕 시끄럽게 하고는 금방 홀랑 떠나버렸다. 그들이 오래 있었다고 좋았을까 싶지만 금방 가는 것도 기분 나쁘긴 매한가지다. '그럼 그렇지' 소리가 절로 나온다. 고작 90분의 영화로 시골 사람들의 텃세를 이해해버린 것이다. 마치 자기 땅인 것마냥 구는 사람들, 정당하게 이사 왔는데 경계하고 불쾌할 정도로 참견하는 사람들의 심경을 겪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해가 됐다고 수긍이 되는 건 아니다. 감정이 정당하다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달갑지 않은 마음을 '깡!' 깨버리고, 규칙을 들이밀어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 영화는 그 해답도 같이 준다. '어린이'다. 고맥락의 규칙들은 중요하지 않은, 강아지가 귀엽다는 이유로 홀랑 옆집에 가서 인사할 수 있는 어린이들이라면 어른들도 얼굴을 트고 인사를 나누게 된다.
어린이를 도구화 하자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는 금물 ! 어린이들이 더 많은 곳에서 환대받는 경험을 하면 더 많은 어른들이 이웃이 될 수도 있을 거란 뜻이다. 아무리 막아도 경계를 넘어가는 존재가 필요하고, 넘어온 존재를 환대할 환경이 있을 때 선주민과 후주민, 토박이와 이주민들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겐 얼굴을 마주하고, 웃으며 인사하게 될 우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