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의 진짜 얼굴은 음식에 있다
시드니는 단일한 얼굴을 가진 도시가 아니다. 지도 위에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실상은 수십 개의 민족과 문화가 병렬로 살아가는 복합적인 공간이다.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이 더 잘 말해준다.
Suburb를 기준으로 본다면, 시드니는 국경 없는 음식지도로 바뀐다. Cabramatta에선 쌀국수와 두리안의 향이 섞이고, Auburn에선 향신료와 기름진 케밥이 공기를 채운다. Burwood에서는 훠궈와 탕수육이 점심 식탁을 채우고, Lidcombe에선 순대국과 김치찌개가 한국의 서울처럼 익숙하다. 한 도시 안에 중동, 아시아, 유럽의 식탁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다양성은 단지 메뉴의 외형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드니의 음식은 누군가의 생계이자 기억이며, 고향의 손맛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의 일상 그 자체다. 관광객을 위해 포장된 음식이 아니라, 이민자들이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 매일 만들어내는 음식이다.
그래서 시드니의 음식은 서울의 이태원과는 다르다. 이태원이 ‘서울화된 글로벌 푸드’를 소비하는 공간이라면, 시드니 각각의 Suburb는 이민 커뮤니티의 정체성과 생존이 스며든 장소다. 언뜻 비슷해 보여도, 근본은 다르다. 가게 간판은 영어와 모국어가 함께 쓰여 있고, 메뉴판엔 번역이 없는 경우도 있다. 추천을 받기 위해선 그 나라 언어 몇 마디쯤은 배워야 할 수도 있다. 불편함이 있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도시의 진짜 매력을 느끼는 입구가 된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게 된다. 이 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각 커뮤니티에 있는 음식은 외국인의 입맛을 고려한 친절한 퓨전이 아니다. 현지인에게 팔기 위해 변형된 음식도 아니다. 그것은 그곳에 사는 커뮤니티를 위한, 안쪽을 향해 있는 음식이다.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에겐 때로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낯섦은 진짜 ‘살아 있는 문화’가 지닌 증거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이곳의 음식들은 고향의 향을 닮았지만, 그리움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어긋남이 언제나 한 스푼쯤 섞여 있다. 고향의 맛을 ‘복제’하려는 시도와, 그 결과로 생기는 차이 사이에는 늘 거리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거리감조차 이민자 문화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같지 않기에, 더 절실하게 지켜지려는 맛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그리고 스페인과 영국에서 살아봤다. 그 나라들은 정체성이 명확한 ‘본토 국가’였다. 이민자는 언제나 주변부였고, 나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늘 그 곁에서 외지인으로 살아갔다. 정해진 주류의 바깥에서 살면서, 익숙해지지 않는 어떤 경계감을 늘 안고 있었다.
그런데 시드니에선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 이민자는 ‘바깥’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 중 하나다. 모두가 외지인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동등하다. 누가 더 중심이고 주변인지 구분 짓는 일이 의미 없어지는 이 도시는 백인 앵글로 색슨족이 여전히 주류로 보이지만, 그조차 절대적인 중심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런 구조 속에서 나는 익숙한 배제감이 아닌, 처음 마주하는 평행한 낯섦을 느꼈다. 위계 없이 병렬로 놓인 수많은 식탁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수 안의 하나’로 존재해본다.
시드니에서 한 끼를 먹는다는 건 결국, 어떤 공동체의 내밀한 문화에 조용히 접속하는 일이다. 그건 단순한 소비 행위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지닌 기억의 연장선에 발을 디디는 경험이다. 그 고향은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로 인해 시드니의 식탁은 더욱 풍성해진다.
시드니의 음식 문화는 잘 다듬어진 퓨전이나 미식 트렌드가 아니다.
날것 그대로의 삶이 축적된, 이민자 공동체의 기록이다.
이 도시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국적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막 그 식탁에 앉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도시의 다양한 suburb를 따라 걸으며,
그 동네만의 음식과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천천히 들여다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