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드니시 - Lidcombe

I LIDCOMBE YOU

by 최환석

2025년 ○월 ○일, 흐림


오늘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세수만 대충 하고 리드컴 역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기 전, 토마토김밥에서 참치김밥 한 줄을 샀다. 새벽인데도 줄이 있었다.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일은 지겨웠고, 사람들은 지쳐 보였다.


퇴근 후 다시 리드컴으로 돌아와 나라와 민별이, 상아랑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근처에서 인생네컷을 찍었다. 한국보다 화질은 좀 떨어졌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와플보이즈에서 새로나온 전남친 와플과 애플시나몬 와플을 먹었다. 오늘 하루 내내 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긴 시드니다.


아내와 약속이 있어서 나온 금요일 저녁의 리드컴은 시드니라고 믿기 힘들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한국인들, 한국 식당마다 가득 차 있던 한국인들, 술에 취해 중앙식품에서 숙취해소제를 찾던 사람들. 풍경은 한국이었고, 말소리도 한국어였지만, 가끔씩 스치는 영어가 이곳이 시드니임을 상기시켰다. 익숙한 얼굴과 이질적인 공기가 동시에 머무는 곳. 그게 리드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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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약속 2차로 들른 리드컴의 ‘오늘밤’. 젊은 층 사이에선 이미 핫플레이스. 시드니라고 말하지 않으면 성수동이라 해도 믿을 분위기다..


리드컴은 시드니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교외 지역이지만,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생활의 중심에 가까운 동네다. 막 이주해 온 사람도,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살아온 이들도 이곳을 기반 삼아 살아간다. 단순히 한식당이나 마트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곳엔 이미 하나의 구조가 형성돼 있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거비, 기차역을 중심으로 한 뛰어난 교통 접근성 같은 조건들이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리드컴 쇼핑센터에 대형 한인마트 ‘Fresh Asiana’가 입점하면서 상권이 눈에 띄게 커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 모든 흐름이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지금의 리드컴은 명백히 ‘생활 기반이 형성된’ 한인 커뮤니티다.


누군가는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것을 소비한다.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 순환 구조가 리드컴의 상권을 지탱하고 있다. 상권이 커질수록 거주지는 넓어지고, 거주지가 넓어질수록 또 다른 상권이 자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리드컴은 간판과 냄새, 말소리와 식탁까지, 점점 더 촘촘하게 한국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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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컴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풍경.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한국과는 달리 낮고 널찍한 상가 건물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외국에서 가끔 마주치는 한식당들은 대개 김밥, 라면, 비빔밥, 찌개류까지 한 메뉴판에 모두 들어 있다. 하지만 리드컴은 다르다. 감자탕집은 감자탕만 팔고, 횟집은 회만 판다. 국밥집, 중식당, 고깃집, 치킨집이 각각 독립되어 있어, 무엇을 먹고 싶은지에 따라 가게를 고르면 된다.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건, 이곳에서 한식이 단지 향수나 취향의 대상이 아니라, 매일의 식사이자 일상적인 외식의 일부라는 뜻이다.


그런데 리드컴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게 하나 있다. 어쩐지 이곳이, 내가 기억하는 한국보다 몇 년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낡은 간판, 오래된 폰트, 밀레니엄 감성을 닮은 인테리어까지. 마치 시간을 멈춘 듯한 한국을, 이곳은 지금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

KakaoTalk_Photo_2025-06-19-17-58-04 002.jpeg 개인적으로 리드컴의 상징 같은 공간이라 느끼는 ‘중앙식품’. ‘슈퍼마-켙’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정감 있는 외관이지만, 의외로 알찬 구성 덕에 자주 찾게 된다.


그런 공간 속에서 내가 인상 깊게 방문한 곳은 ‘이모네 해장국’이다. 간판은 깔끔하고, 유리창이 넓게 나 있어 밝고 환하다. 대표 메뉴인 순대국밥에는 이름처럼 순대와 내장이 아낌없이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정갈하다. 깍두기는 조금 평범하지만 김치는 괜찮은 편이다. 무엇보다 반찬이 모두 리필되고, ‘보통’과 ‘특’ 사이의 양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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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맨, 여권 없이도 활동 중. 해외에서도 국밥은 국밥이다.

얼마 전 처음 가본 ‘이대로 감자탕’도 인상 깊었다. 메뉴는 오직 감자탕 하나뿐이었는데, 그 단일한 메뉴로 가게를 가득 채운 게 놀라웠다. 들깨가루가 적당히 들어간 묵직한 국물과, 고기가 한가득 붙은 감자뼈, 잘 삶아진 우거지에 여러 가지 사리 옵션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리고 지금은 6월. 내 인생의 달력에선 늘 여름이던 6월이, 여기선 감자탕이 어울리는 계절이 되었다. 따뜻한 국물을 들이키며, 낯선 겨울 속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런데 그 겨울 속의 한식당은 너무도 익숙했다. 음식 냄새와 말소리, 약간은 시대가 지나간 한국 음악, 가게 분위기까지. 그 익숙함이 시드니라는 감각을 잠시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다 외국인 직원이 건넨 영어 한마디에, 다시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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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해장국 L 사이즈. 국물 아래에 뼈가 더 깔려 있는 줄도 모르고 추가로 주문했다가, 진심으로 배가 찢어질 뻔했다.


한식이 흔해졌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곳에선 한식이 그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나는 과거에 리드컴에서 일한 적이 있다. 1주일치 집밥 메뉴를 짜서 주문을 받고 공급하는 밀키트 공장이었는데, 그런 업체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각 업체마다 단골 고객이 있었고, 정해진 지역에 정기적으로 배달도 나갔다.

단순한 편의를 넘은, 이 커뮤니티의 생활 규모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스페인에 살던 시절, 한식을 먹는 일은 ‘일상’이라기보다 작은 이벤트에 가까웠다. 한국 식자재를 마드리드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한 뒤 며칠을 기다려 받았고, 품어온 식욕은 몇 안되는 한국인 친구들과 약속에 맞춰 조심스럽게 꺼내야 했다. 준비도, 마음도 필요했다.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한식이 완성됐다.


하지만 여기선 다르다. 혼자여도 괜찮다. 식욕 하나면 충분하다. 리드컴엔 그걸 채워줄 장소가 너무도 많다. 감자탕이 먹고 싶은 날엔 이대로 감자탕으로 향하고, 기쁜 날엔 중앙갈비에서 고기를 굽는다. 모임이 끝난 밤엔 빨간고추에서 후라이드 치킨에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 풍경이 너무 익숙해서, 문득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는다. 시드니 한복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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