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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샘 Jul 18. 2024

만화가를 꿈꾸던 아이의 절망

고통스러운 절망의 순간보다 그 과정을 더 기억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책가방 조사가 시작되었다.

공책검사다. 

아버지는 공책 앞페이지부터 찬찬히 보기 시작하더니 돌연 맨 뒷장으로 넘겼다.


줄이 가지런히 쳐진 공책 맨 뒷장엔 당시 10대 여자 아이들의 로망인  이쁜 드레스 차림에 왕방울만한 눈을 가진 긴머리 소녀가 있었다. 


한장을 넘겼다. 

이번엔 고운 한복에 길게 머리를 땋아 귀 옆으로 가져와 가슴팍까지 가지런히 내려놓은 소녀가 있었다.

바로 옆 페이지에도 비슷한 복장의 여자아이들이 계속 나왔다. 


공책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방을 통째로 갖고 오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계속 옆에서 한숨을 연신 내뱉고 있던 엄마는 가방은 절대 안뺏기겠다며 엉덩이 뒤로 숨기는 나에게서 잽싸게 가로채 아버지에게 건네주셨다.

몇 권 안되는 공책은 모두 비슷비슷했다.


풀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린 공책 속에 그려진 이쁜 소녀들이 사정없이 찢겨져 나가고서야 공책은 가방 속에 다시 들어갔다. 


그리곤 아버지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셨다. 

당시(1970년대 시골)만해도 부엌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그 날도 아침밥을 지은 탓에  불씨가 꺼지지 않고 발갛게 남아있었다.


순간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아부지~ ~~~ 안됨미더~~엄마아~ 가방~~~" 


그날 아궁이를 향해  아버지가 가방을 던지는 시늉을 하시자 나는 까무라칠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얼굴엔 눈물,콧물이 범벅이 된 상태에서 울어대는  어린 나의 발악이  어이가 없었던지 아궁이로 던지려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는 집 밖으로 나가 지붕위에 책가방을  휙~ 던져버렸다. 

아마도 그 집의 지붕은 어린 내가 보기엔 내 키의 4배는 되어보였다. 

그 때 우리가족이 살던 집은 일본식 집으로 전통 한국집과 달리 층고가 높았고 그러다 보니 지붕도 높았다. 

아궁이에서 탈 뻔한 가방이 살아서 지붕으로 올라갔지만 어린 내겐 그것도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갈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난 가방을 갖고 내려올 능력이 없었다. 


아궁이에 들어갈 때 보다 더한 발악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답답하고 무력한 마음에 바닥을 뒹굴지 않았을까싶다.

그걸 상상해볼 수 있는 이유는 이후로는 내 가방이 지붕위로 올라간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그런 무자비한 박해보다는 비아냥과 조소로 연명했다. 만화그림을 그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금도 나는 그 때 그 가방이 어떻게 내 손에 다시 들어와 학교를 가게 되었는 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직 기억이 나는 건 지붕 위에 올라간 가방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지독한 무력감과 공포에 떨었던 기억밖에.


왜 그 때는 학교 못가면 만화방가면 되지나 바닷가에 놀러가버리지 하는 배짱은 없었을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그 때의 절망과 공포

 

그렇게 울어대던 10살의 내가  50대가 쑤욱 넘어간 지금의 나에게서도 보인다. 


살다가  힘든 상황에 맞닿을 때면 그 사실에 매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기조차 했던 그간의 기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늘 문제가 해결되어져야만 그 자리에서 떠날 수 있었다. 

잠시 그것과 떨어져 다른 생각을 하든지, 일단 멈춰보든지, 어떻게 되겠지 하는 섣부른 기대를 갖지도 않았다. 


이유가 뭘까?


내 안에 두려움에 맞서는 항체가 선천적으로 결핍되어있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힘든 일이 닥칠 때면 그 전장에 머물러 전전긍긍했던 것일까?  


그 무력감을 느낄만큼 공포스러웠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난 얼마지 않아 다시 만화를 그렸고 나의 낙서는 공책에서 스케치북으로 종횡무진하며 학교를 즐겁게 다녔어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기억 속에 고통만 저장하고 고통 이후의 평범했지만  따뜻했던 기억은 의미를 적게 부여하고  살았다. 


때마다 공책이 찢어지는 야단을 맞으면서도 만화그리기를 좋아하고 만화방을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거렸던 행복한 기억이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웃어넘길 줄 아는 캔디가 있어서 행복했고 정신분열병에 걸린 주인공이 하얀 벽에 무언가를 그리기만 하면 실제가 되는 환각에 빠진 것을 보며 내 어린 인생의 결핍을 달랬다.


불행한 기억들이 지금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고 있을 지 모른다.

좀 깊이 생각해보면 불행한 기억에는 반드시 그 기억을 보상하는 따뜻한 기억이 함께 있을 때가 많았다.  


이제 내 기억창고에서 늘 빨간 줄이 쳐져있던 힘들었던 기억의 밑줄을 지우고 그 기억이 있었기에 더 아름답고 소중했던 따뜻한 기억에 희망의 푸른 줄을 긋자


어느 날 기억을 더듬을 때 바로 눈에 띌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말이다. 


또 어느 날 나의 삶에 알수 없는 폭풍이 몰아칠 때

"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잠시 마음을 그 폭풍에서 밀어내어 다른 곳에 둘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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