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구(口)

화가와 소녀 [초단편 03]

by 연서글서


빛 반사를 이용한 투명한 구체로 영롱한 색채를 뽐낼 줄 아는 풍경화가 그에게 1년 전 빛이라곤 하나 없는 암흑이 찾아왔다. 여느 날과 같이 반짝이는 빛을 좇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는데 하필이면 양손 가득 풍경을 담던 카메라와 스케치 도구가 든 가방을 안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넘어지던 몸을 지지할 수 없던 그는 얼굴부터 내리꽂으며 그가 쓰고 있던 안경알 파편에 눈이 찔리고 말았다. 급히 수술실로 실려갔지만 각막이 심하게 손상되어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실명으로 판정나버렸다. 찰나의 순간 색채의 반짝임을 표현하던 화가는 더 이상 남은 생애 동안 찬란한 빛을 만날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커다란 절망에 빠진 비운의 화가는 술과 화에 잠식되어 시간을 흘러 보낸다. 화가의 팬이자 에이전트는 이 암울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는 중 비운의 맹인화가의 전시회를 찾아온 소녀와 마주하게 된다. 태생이 가난한 소녀는 여태껏 가까운 바다 한 번 여행을 다녀온 적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가정에서 자라 부모님께 이번 방학에 어디 한 번 1박 2일이라도 좋으니 놀러 가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게 되면 친구들은 해외 어디를 갔다 왔는데 좋더라 너도 한 번 가봐라 하고 떠들면 그저 얼굴에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성인이 되고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며 잘 다녀오라 다음에 함께 가자라는 입 바랜 배웅이 다였다.


그런 소녀에게도 빛은 있었다. 매일 달리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반짝임과 휴일에 찾아가 보는 낯선 풍경화나 사진 전시회가 소녀의 빛이다. 남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빛을 소녀는 오래도록 소화해 왔다.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 막막한 일상에서 벗어나려 전시회를 찾은 소녀는 화가의 작품에서 감동과 안타까움을 그만 너무 크게 소화하다 보니 입 밖으로 쏟아져버렸다. 때마침 소녀의 옆을 지나가 던 화가의 에이전트가 쏟아지던 찬사를 듣게 되었다. 경이로운 색채를 표현하는 언어를 들은 에이전트 뇌리에 아이디어가 반짝였다.


화가가 뿜어낸 빛을 똑같이 흡수하는 눈이라니! 해답을 찾았다! 즉시 에이전트는 소녀를 꼬여 화가를 만나러 갔다. 소녀에게 화가의 눈이 되어 달라 구애하며 동시에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화가를 낚아챈다. 에이전트는 소녀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이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말해달라 한다. 그 사진은 화가가 본 마지막 풍경이자, 아직 담아내지 못한 색채였다. 소녀의 입에서 들려오는 그날 그 시간의 그 찬란한 빛이 화가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23년 6월 쓰다:Re 모임에 제출한 글이다. 내가 지금까지 써온 글 중 단연 최고의 완성된 글이며, 그날 찬사도 많이 받았기에 매우 뿌듯한 글이다. 6월 콘텐츠는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였고, 글감 주제는 「통신」이었다. 《아멜리에》는 정말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라 많은 분들께 추천드린다.


잠깐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주인공 아멜리는 금요일 밤 혼자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아가씨다. 극장에서 영화 보는 사람들 표정을 살피는 것과 아무도 찾지 못한 옥에 티를 찾아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작전을 즐기는 개구쟁이의 모습을 지닌 사랑스러운 ENFJ 성향을 가져 많은 커플을 탄생시키는 짱구 같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유리 인간 할아버지의 대사 "이 아가씨는 작전을 꽤 좋아하는군/해석하자면 그건 용기가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표정을 그릴 수 없었던 거야."로 꼽을 수 있다. 아멜리처럼 상처받을까 봐 용기 내지 못했던 과거들이 생각이 났고 이 대사에 반해 이번 글이 탄생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 글로 연극이나 뮤지컬 대본으로 바꿔 만들어보고자 한다. 최근 뮤지컬 《레드북》을 관람했는데 그 감동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으며 나도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뮤지컬로 만든다면 어떤 소재의 글이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다시 읽은 나의 성공작은 거기에 딱 걸맞은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설렌다. 나의 새로운 도전, 브런치에 공개할 날이 머지않을지도.



도입부

여기에 빛을 좇는 남자가 있다.

여기에 빛을 삼키는 소녀가 있다.


종결부

이제 이곳엔 빛을 소화하는 남자가 있다.

이제 이곳엔 빛을 출력하는 소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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