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드림

반전 [초단편 02]

by 연서글서


루시드 드림(lucid dreaming, 자각몽). 나는 지금 꿈속에 서있다. 최근 웹소설에 빠져 로판 세계관을 뇌가 형성한 듯하다. 꿈은 우리가 잠을 잘 때 뇌 속을 청소하며 불필요한 찌꺼기들을 한데 뭉쳐 보이는 현상이라고 들은 바 있다. '오늘의 필터'에 걸린 찌꺼기는 「마법」인가 보다.


나는 지금 마법진 위에 앉아 로브 쓴 노인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있다. 약간 오컬트스러운 분위기가 오싹한 게, 괜히 바닥이 차갑기라도 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꿈인데 느껴질 리가. 이런 판타지스러움. 나는 이런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 아주 좋아한다. 도피처 삼아 스트레스만 받으면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많았다. 이 익숙함, 어디서 본 듯한 이 데자 뷰(deja vu)! 꿈속에서의 나는 새로운 모험의 시작에 희열을 느낀다.


카더라로 듣기론 루시드 드림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내 쪼대로 꿈을 구현할 수 있다 했다. 꿈에서 깼을 때 다시 이어서 꾸는 것과 같지 않을까? 몇 번 성공한 경험으로 이번 꿈도 나의 지시대로 움직일 것이다. 지금 저들이 나를 보며 무언가 말을 하지만 나의 귀엔 들려오지 않는다. 약간 꼬부랑 어인 거 같은데 영어일까? 알고 보면 나 비어(Lì'fya leNa'vi,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 언어) 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들은 알 수 없는 외계어는 그 둘밖에 없으니까. 사실 한국어 아닌 언어를 구분하는 능력이 없다는 건 안 비밀이지만 말이다.


놈들을 따라 나도 비슷하게 소리 내 보았다. 어차피 내 꿈인데 그냥 알아들어라, 이것들아. 그러자 놈들이 갑자기 지팡이를 나에게 겨눈다. 내가 한 말이 뭔가 공격적인 말이었나 보다. 나도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현대문명의 비기, 총을 구현해 봤다. 하지만 총은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손가락 총'으로 그들을 위협 사격하기로 한다. "빵!" 총소리도 함께면 금상첨화. 나의 뇌는 칼과 총, 대포를 아무리 봐도 구현할 줄 모르는 백치 뇌다. 매번 꿈속에서 강력한 무기를 원해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러한 모션밖에 없다. 무슨 양자역학도 아니고, 내 손에 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니... 어쨌든 지금 나는 꿈속에 있으니 꿈의 일부일 뿐인 놈들이 나를 이해해야 하는 게 맞다. 이게 맞다.


나의 위협사격에 놀란 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또 저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지팡이를 위로 든다. 외계어와 함께 빛무리가 주변을 밝히는 순간, 나는 짐작했다. 아, 꿈에서 깰 시간이구나. 벌써 아침이군. 아 시발, 출근하기 정말 싫다.


***


오랜 우리의 숙원이 드디어 현실이 되어 행해진 최초의 마법인데 웬 미친놈이 소환됐다. 술식이 어딘가 잘 못 된 듯하다. 마법진을 계속 확인해 보았지만 어디가 틀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두 손을 잡고 손가락질을 하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저 미친놈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몇백 년에 걸쳐서 완성한 마법진인데 이렇게 장렬히 실패할 수 있나! 어쨌든 동료들과 저 미친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의견을 나눴다. 그래도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인간이 아까우니 실험체로라도 사용하자는 동료의 의견은, "빵!"소리와 함께 불발됐다. 왠지 저 불순물이 우리 세계에 속해지는 순간 똥칠 할 것 같은 악영향에 땀이 삐질 났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똥칠을 막기 위해 서둘러 우리는 마법진을 재가동시켰다. 다시 너네 세계로 얼른 꺼져라, 이놈아!


- 알고 보니 이(異) 세계에 소환당한 나,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만?! ~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 ~




읽지 않은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글쓰기의 규칙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하루키는 딱 하루 분량만큼만 쓰고 더 쓰고 싶더라도 다음날을 위해서 남겨둔다. 그러므로 쓰기가 기대되어 끊기지 않는, 이어지는 글이 된다고 한다. 이 책은 아직 읽어 보지 않았지만 마음 가는 책이 되었다. 지금은 내 책장에 고이 모셔놓은 책이다.(이번 달에야 말로 기필코 읽겠다!)


글을 진짜로 쓰겠다고 다짐하자 쓰고 싶은 소재거리가 넘쳐난다. 이 글은 글쓰기 모임용 글이 아닌, 도저히 이 소재는 놓칠 수 없었던 날 새벽 감성으로 쓴 글이다. 자려고 눈 감으면 다음 내용은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하고 자꾸 뇌가 돌아가 쓰고, 쓰고, 또 썼다. 규칙성이 없었던 그날, 타오르던 투지가 손 끝에서 기화되어 그 열정만큼의 글이 지금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 글의 글감 주제도 있다. 바로 「영어 울렁증」이다. 왕초보 작가 지망생의 높은 의욕은 새해 다짐하는 영어공부와 상통한다. 새해면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영어 울렁증 극복!' 프로젝트는 첫날이 가장 즐겁고, 30분 같은 3시간의 시간이 지나면 올 한 해 영어공부는 다했다 보면 된다. 정말 시도만 좋았다. 이제까지의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루키의 말처럼 더 쓰고 싶더라도 다음날을 위해서 남겨둬야 했는데 페이스 러너가 없었던 나의 영어 공부와 글쓰기는 페이스를 잃는 해가 많았다. 하지만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100% 참석율은 보이진 못해 왔지만 3년 동안 꾸준히 달에 한 편씩은 완성해 왔다. 그리고 올해에는 100% 참석율을 다짐한다. 나와 함께 글을 써주는 라이팅 러너(Writing Runner)들 덕에 나는 글을 놓지 않고 이렇게 오늘도 한 편 올려본다.


아 참, 영어 공부도 함께할 동지를 얻었다. 올해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