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동 비빔밥이여, 잠을 가져가다오 [초단편 19]
기영이 봄볕의 꿈속을 유영하다 타닥타닥 울리우는 타자기의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침 흘린 입가와 눌린 자국의 볼은 그가 방금 깼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옆자리 김 과장은 "어제 한잔 했어? 유대리" 라며 은근한 타박을 준다. 곱게 깨워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인가 핀잔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김 과장에게 속으로 투덜 되는 기영이다. "아닙니다." 기영은 입가와 눌린 머리를 정돈하곤 절전모드에 들어간 PC를 켜고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비몽사몽 한 뇌는 아직도 꿈결을 유영 중인가 보다.
"유대리? 유대리!" 팀장의 부름에 기영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넵!" 황급히 대답을 하고는 뛰어갔다. 업무 지시를 하는데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었지만 기영은 다 알아들은 척 대답을 하곤 자리로 돌아왔다. 마른세수를 하고 뺨을 살짝 두드려도 쉬이 잠은 깨지 않는다. 완연한 봄이 다가오는 요즘 기영은 춘곤증 때문에 점심시간 이후 오후 업무시간이 아주 죽을 맛이었다.
사내 메신저가 울린다. '커피 한잔?' 옆자리 과장의 부름에 기영은 잠깐 자리를 비우며 커피 한 잔 뽑았다. 예전에는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마시던 그는 이제는 오후 업무시간엔 늘 달달한 커피를 찾게 된다. 달고 진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시원하게 양치를 하면 잇몸부터 개운해져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는 기영이었다.
"유대리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아무래도 춘곤증이 온 것 같습니다. 과장님은 괜찮으신가요?"
"일에 집중을 안 하니까 그래. 나는 업무 생각에 잠이 안 와~"
일하다가 중간중간 자신의 차로 가 눈 붙이고 오는 것을 팀원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입만 살은 밉살맞은 김 과장이라고 기영은 생각했다. 이래서 자차가 필요한 것인지 고민해 보는 그였지만 서불리 차를 구매할 순 없었다. 최근 독립을 하면서 목돈을 전부 써버렸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얹혀 살 때와는 달리 독립을 하니 드는 돈이 생각보다 많았다. 식비라도 아끼기 위해 기영은 2주에 한 번씩 본가로 내려가 반찬을 얻어왔다. 본가와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기영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영도 왕복 2시간 거리를 움직일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지는 자취인이 되었다. 냉장고에 밑반찬이 다 떨어져 이번 주는 부모님 집에 들러야 하는데 벌써부터 그 먼 길을 움직일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것이 다 피곤해졌다. '이번 주는 그냥 가지 말까? 생활비도 지금 바닥나 궁한데 어쩌지.' 기영이 기계적으로 움직여 일을 처리하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때마침 카톡이 울렸다.
― 엄마 볼일 있어서 들렀다 간다. 밑반찬 냉장고에 채워놨어. 집에 와서 밥 먹어. 집 좀 치우고.
나이스. 어머니의 은혜에 감동한 기영이었다. 반찬은 뭐가 있을까 장조림이 있으면 좋겠는데. 꿀단지를 숨겨둔 곰처럼 얼른 퇴근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린다. 기영은 칼퇴를 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갈 생각에 들떠 잠이 확 달아남을 느꼈다. '역시 먹기 전부터 엄마의 밥은 보약이라니까.' 퇴근 후 집으로 곧장 온 기영은 손 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냉장고로 향했다. 어떤 반찬들이 있는지 살펴보는데 온통 나물 반찬만이 즐비했다. 잠깐 실망한 기영은 일단 나물 반찬을 다 꺼내 보았다. 머위, 달래장, 냉이무침, 참나물, 취나물, 그리고 봄동 겉절이까지. 절간 마냥 봄나물이 가득했다. 봄동 겉절이 위에는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 비벼먹어.
기영은 착한 효자답게 어머니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밥을 따뜻하게 데운 후 계란 프라이를 두어 개 굽는다. 그리고 봄나물 반찬들을 종류별로 그릇에 담으며 고추장을 한 숟갈 듬뿍 푼다. 군침이 돌은 기영은 애초에 실망했던 기색 없이 맛있게 참기름을 한 바퀴 둘려 콧노래를 부르면 밥을 비비기 시작한다. 한국사람은 비벼야 해. 밥도 비비고 부모님께 비벼 반찬도 얻어내고.
한술 떠먹은 제철 봄나물 비빔밥은 알싸하고 향긋한 맛을 자아내며 참기름의 향은 풍미를 끌어올린다. 기영은 한 술 더 크게 떠먹으며 TV를 켠다. 넷플릭스에 혼밥 할 때 시청하기 좋은 영상을 찾아 튼다. 하루 종일 노곤했던 정신이 봄나물 비빔밥과 함께 섞여 입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영이었다.
봄 날씨와 함께 찾아온 글감 주제 「춘곤증」으로 춘곤증을 이겨내는 소설을 한 번 써보았다. 하루 온종일 잠이 쏟아져 춘곤증을 검색했더니 봄철 제철 나물 반찬을 먹으면 된다는 글을 보았다. 이걸로 한 번 맛있는 소설을 써보자 싶어 글을 썼는데 막상 음식 표현을 하려니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매번 1인칭 소설을 쓰다 이번에 3인칭 시점의 소설을 써보니 자꾸 시점 이탈이 발생한다. 나도 모르게 '나'가 나타나고 아무래도 1인칭 시점 같은데 싶어 필살기 마냥 기영의 이름만을 울부짖었다. 이게 맞나 싶게 써졌다.
처음 써보는 맛깔난 음식 이야기 소설과 3인칭 소설은 나의 도전 욕구를 일으킨다. 몇 번 더 써보면서 자연스럽게 묘사하는 글쓰기 법을 터득해 보아야겠다. 나는 또 한층 더 글쓰기의 성장 레벨을 올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