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세종대왕을 만나버린 거야.

물결표가 넘실거리던 그 일기장이 변모하던 순간!

by 최첨지

최첨지는 종이와 연필을 사랑한다. 첨지로 말하자면 국초딩 3학년 때 교내 예쁜 글쓰기 대회에서 전교 1등을 차지한 이래로 늘 글씨체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다. 과장이 아니다. 수업 시간뿐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도 첨지는 글씨체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칭찬을 듣고 싶어서라도 첨지는 이유 없이 글을 썼다. 남들 다 노트북으로 과제를 할 때 첨지는 굳이 친필을 고집했다. 주민센터에서도, 은행에서도 “글씨 정말 잘 쓰시네요!” 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 맛은 짜릿했다. 그래서 첨지는 몰랐다. 예쁘지 않은 글씨체란 무엇인지 말이다.

H가 글씨를 쓸 줄 알게 된 시점부터 첨지는 의아했다. 연필을 저렇게 쥐는 게 맞나..?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교정장치를 끼워볼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H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필을 쥐었다. 이건 시작이었다. H의 글씨체는 더욱 의아했다. H가 쓴 편지는 마치 지령이 담긴 암호처럼 해독하기 어려웠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악필인가? 하지만 아직 초딩이다. 희망을 가져보자. 첨지는 8칸 노트, 10칸 노트부터 시작했다. 조금씩 나아졌다. 희망에 싹이 텄다. 대망의 3학년이 되던 날, 고학년의 상징인 줄글 노트를 집에 들였다. 그리고.. 더 큰 문제를 보았다.


H는 쓰려는 문장이 길수록 개미처럼 작게 썼다. 줄을 바꾸면 될 텐데, 끝까지 한 줄 안에 욱여넣었다. 반대로 별로 쓰고 싶은 글이 그닥 없을 때는 줄을 채우느라 글자를 대문짝만하게 썼다. 귀찮을 땐 글 대신 물결표로 한 장을 채우는 일도 잦았다. 일기 숙제가 있는 날이면 첨지의 마음은 콩닥콩닥 뛰었다. ‘선생님이 보신다면.. 얘가 바보라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H가 이걸 학교에 가져가기 전에 첨지가 낚아채야만 했다. 이 일기장이 선생님 눈에 띄기라도 하면, H가 아닌 첨지가 민망해서 밤잠을 설칠 게 뻔했다.

첨지의 불안이 잠식된 것은 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은 예외적으로 일기에 주제가 있는 날이었다. 주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보통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에 대해 쓰지 않을까? 하지만 H는 달랐다. 그녀의 선택은 ‘세종대왕’이었다. 얼마 전 책에서 읽었다고 했다. H가 갑자기 버닝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일기는 좀처럼 끝맺을 생각이 없었다. 두 장이 가뿐히 넘어갔고, 네 장째 이르러 첨지가 눈물로 읍소해서야 간신히 끝을 맺었다. 아직 쓸 글이 남았다며 H는 아쉬워했다.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첨지는 뭔가 깨달았다. 악필이 중한 게 아니었다. H는, 동기부여가 제대로만 된다면, 강력한 추진력이 있었던 것이었다.


세종대왕 사건으로 최첨지의 마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학기가 끝난 후 담임 선생님의 코멘트로 이 마음은 더욱 확실해졌다. [글쓰기에 흥미가 있으며, 특히 세종대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줄 안다.] 아, 공신력까지 더해졌다. 그렇고 보니, 아인슈타인도 악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아직도 첨지는 H의 일기장을 볼 때면 심장이 벌렁거린다. 잠깐 세종대왕을 만나 반짝였을뿐 일기장에는 여전히 물결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첨지는 이제 안다. 글씨체는 언젠간 나아지겠지. H는 적어도 글을 싫어하는 아이는 아닌 것 같다. ‘쓰기 싫은 글’을 싫어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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