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랑 최씨 고집이랑 싸우면 누가 이겨?

막상막상 or 막하막하

by 최첨지

뮤지컬을 보러 가는 날. 최첨지는 아침부터 설렜다. H를 임신했던 그날부터 아이들과 문화생활을 함께 누리길 학수고대해왔기 때문이다. H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콩순이 뮤지컬 같은 것들을 시도했었지만 언제나 중반쯤 무섭다며 뛰쳐나오기 일쑤였다. 지금은 어엿한 3학년이 되었으니 괜찮겠지.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랑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 온 건지, 첨지는 텀블러와 물티슈 등을 가방에 넣으며 마냥 구름에 떠 있었다.


공연장에는 남편 L이 데려다줬다. 시작이 순탄했다. 도착하고 보니 시간이 조금 남아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J와 H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대감에 찬 발걸음을 여기저기로 옮겼다. 뒤따라 걷는 첨지의 발걸음도 사뭇 가벼웠다. 하지만 그 순간, 모두의 눈에 들어오고야 만 것이 있으니 바로 ‘기념품 샵’이었다.

그래, 자본주의란 그런 것이다. 뮤지컬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벅찬 감동을 집까지 고스란히 가져가고 싶을 것이다. 그런 데에는 기념품이 상당 부분 도움을 준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로 빛났던 그 캐릭터들의 인형, 볼펜, 수첩을 누가 사고 싶지 않을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아이가 그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최첨지 사전에 예쁜 쓰레기를 소비할 순 없었다. 일종의 신념이었다.


운명처럼 H의 레이더에 작고 예쁘고 비싼 기념품이 하나 들어왔다. 작은 조개를 닮은 오로라빛 인형.. 하지만 가격은 작지 않았다. 오, 첨지의 슬픈 예상이 적중했다. H 머릿속 케르베로스가 깨어났다. 머리도 셋이라, 한번 기억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처음에는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는 H를 겨우 달랬다. “오늘은 뭘 사러 나온 날이 아니잖아. 여기에서 파는 건 예쁘지만 비싸.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H는 설득되지 않았지만, 뮤지컬이 시작할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공연장에 들어갔다. 자리도 잘 찾아서 앉았고, 때맞춰 조명과 음악이 흘러나오자 아이들의 마음도 붕 뜨기 시작했다. 기념품 샵을 잊어가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뮤지컬의 시작은 웅장했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어린이 관객들의 정신을 쏙 빼기에 충분했다. 중반부로 넘어가며 내용은 진지해졌고, 점점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인어공주가 등장해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문제의 조개 인형이 들려 있었다.


“엄마!! 저것 봐!!!” 응..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첨지도 이미 보았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다시 원점이다. H는 이제 뮤지컬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온통 조개 인형에만 집중하고 있다. “엄마, 저거 진짜 빛난다.” “엄마, 저거 진짜 푹신해 보인다.” “엄마, 나도 저거 하나만 있으면 밤에 잘 잘 것 같다.” 제발... 첨지는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지켜냈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뮤지컬이 끝난 후에도, 돌아오는 길에도 H는 ‘인형’을 사달라며 짜증을 부렸다. 그래도 첨지는 굽히지 않았다. 황망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H, 첨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불안한 눈빛을 애써 감추던 둘째딸 J. 집에서도 H는 포기를 몰랐다. 그 인형을 사주지 않은 첨지에게 오만 생떼를 썼다. 첨지는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설득이 지나치자 화가 됐고, 한 번 내기 시작한 화는 멈출 줄 몰랐다. 끝까지 가버렸다. 그날은 그냥 파국이었다.

그날 결국 H는 울었다. 첨지가 끝끝내 조개 인형을 사주지 않아서. 인형도 안 사주면서 큰 소리로 화를 내서. 첨지도 울었다. 3학년이나 된 딸이 인형을 못 사서 울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엄마의 소원을 무참히 짓밟고 그깟 인형에만 몰입해서. 애초에 계획했던 건 이런 결말이 아니었기에, 첨지는 오늘 하루가 차라리 꿈같았다. 둘째 J는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 둘 사이를 중재하려 노력했다. 집안도 어수선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애들을 씻겨야 하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땅으로 다 꺼졌으면..


“엄마!” H가 또 첨지를 부른다. 아, 얘는 포기를 모르나? 첨지는 눈빛 한가득 피곤함과 냉기를 머금고 H를 쳐다본다. “엄마! 이거 진짜 맛있어요!” 응? 갑자기 뭔 소리지? 이번에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쳐다본다. H가 주방에서 뭔가를 찾았다. 첨지가 애들 재우고 맥주와 먹으려고 숨겨놨던 육포를, J와 함께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었다. 첨지는 문득, 오늘 아이들 저녁을 챙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H는 오늘 하루가 엉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끗하게 잊은 듯 맛있게 육포를 먹었다. J도 즐거워 보였다. 그래.. 이거면 됐다. 이렇게 하루가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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