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지의 사례를 중심으로 관찰
첨지는 완쾌했다. 허무하게도 타이레놀 9알을 먹고 씻은 듯 나았다. (이 완벽한 약을 누가 무엇의 원인이라 타박했던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추석 전 앓았던 인후염의 후유증이라는 썰이 유효할 뿐, 그것이 불안인지 나발인지 진실은 저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첨지도, 첨지의 가족도 원인까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정신이 돌아온 첨지는 H와 L, 그리고 J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응급실의 추억을 전후로 첨지네 가족은 모두 일사불란하게 첨지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항시적으로다가 드러눕기 바빴던 L은 첨지가 없어도 아이들에게 저녁 공부를 시켰다. J는 사실 엄마가 왜 응급실에 다녀왔는지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대충 눈치를 보고 알아서 행동했다. 그 중 일등공신은 당연히 H였다. 낮 시간 동안 약효가 잔뜩 오른 H는 첨지의 입에서 “끙”소리가 나기 무섭게 옆으로 달려와 수발을 들었다.
H는 마치 첨지의 수족같았다. 죽을 먹다가 “앗, 뜨거.”작게 읊조리면 손풍기를 대령했다. “아이고 죽겠네.”라는 소리에 온 몸을 주물러줬다. ‘좀 춥네.’라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불을 두겹이나 덮어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통증에 괴로워할 첨지를 위해 H는 실시간으로 사랑편지라던가, 직접 만든 종이 장식품같은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날랐다. 침대가 기념품들로 가득찰 때까지. 첨지는 그 옛날 귀족의 기분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행복했다.
그러나 순간, 낯선 감정이 찾아왔다. H가 누군가를 이렇게 극진히 대접한다고? 특히나 첨지를 걱정한다고? H 인생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지금까지 H는 누군가 아프면 본인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먼저 떠올렸다. 세 머리가 동시에 경보음을 울려대는 바람에 온몸에 불안감이 휩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J가 토를 했을 때에는 자신의 이불이 더러워질 것을 걱정했다. 남편 L이 아프면 자신이 심심할 것을 걱정했다.
반면 첨지가 아프다고 하면 H는 은근히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H에게 첨지란 ‘자신에게 제한을 두는 사람, 뭔가를 지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부해라, 씻어라, 잠을 자라, 잠을 자지 말고 일어나라. 이미 첨지는 H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첨지가 아픈 때는 H가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 엄마가 몸이 안 좋으니까 배민으로 햄버거 주문해줄게. 너희끼리 잘 챙겨 먹고 공부는 엄마가 봐줄 수 없으니까 내일 하자.”는 말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H와 J는 그날만큼은 쿵짝이 그렇게 잘 맞았다. 둘은 최대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놀았다. J는 가끔 안방으로 들어와 첨지의 머리에 손을 대보기도 했지만, H는 들여다 보지도 않고 “엄마! 나오지 말고 더 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의 H는 다른 사람이었다. 세 머리가 불안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자신과 놀아주지 않을까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 첨지를 걱정하고, 빨리 낫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남편 L에게 엄마를 위한 점심메뉴를 제안했고, 온 집을 헤집는 동생 J에게 함께 청소를 하자고 권했다. 이게 다 첨지를 위한 행동이었다. ‘아.. 아프지만 더할 나위가 없다.’첨지는 이렇게 생각하며 남은 타이레놀 한 알을 삼킨 뒤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첨지는 가만히 눈을 떴다. L은 출근한 뒤였고, 집안은 생각보다 청결했다.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나가보니 H가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 첨지의 딸.. 사랑스러운 H를 껴안으며 첨지가 말했다.
“우리 딸~ 엄마 아포~” 대답이 없다. 못 들었나? 첨지는 한 번 더 애교를 섞어 말했다.
“H야~ 엄마 어깨가 아야해~”
“... 알아.”
싸늘하다. 목소리가 어제와 다르다. 첨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H가 첨지의 눈을 보며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안다고! 나 바빠.”
아.. 그제사 첨지는 보았다. H의 머리가 다시 세 개가 된 것을.
어제의 다정한 H는 약효와 함께 날아가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