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과 위험은 한 끗 차이

첨지가 연애할 때

by 최첨지

한창 일할 나이, 20대 후반의 첨지. 돈 버느라 바빴지만 이상하게 심심했다. 당시 첨지가 몸담았던 프로그램은 24시간이 모자랐는데, 그래서인지 첨지의 뇌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잠잘 시간도 없으면서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연애. 첨지에겐 늘 확고한 이상형이 있었는데, 바로 눈썹이 짙은 곰돌이 푸 스타일이었다. 꽉 껴안았을 때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람. 많을 것 같지만 막상 찾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남자가 참 많았다. 넓디넓은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버린 L. 도파민이 부족했던 첨지와 L이 만나 그렇게 역사가 시작되었다.


첨지는 바다 여자라 세련된 서울말이 좋았다. 그래서 서울 말투의 L도 좋았다. 둘은 이태원에서 자만추했기에 L이 당연히 서울 남자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L은 사실 감자 남자였다. 강원도 원주 정도면 서울이나 진배없다고 했다. 그것을 쌀국수집에서 면치기하다 들었을 때, 첨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요상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장, 그곳에서 온 L이 미스터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기에 신선했다. 감자 남자의 눈빛을 한 L은 그저 첨지가 예뻐서 좋다고 했다. 일에 점철되어 망가진 뇌를 풀가동한 첨지는 결심했다. 사고 한 번 쳐보자.


첨지는 본디 겁이 많았다. 통 큰 바다 여자답지 않게 늘 소심함을 안고 살았다. 그 소심함 때문에 놓친 기회도 많았다. 해외여행도 그리 자주 가보지 못했다. 하물며 남자랑은 말해 뭐 할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늘 난관에 부딪혀. 하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잘 끝났어.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어.” 힘주어 말하는 감자 남자를 보면 신뢰를 넘어 추앙할 것만 같았다. 그래. 함께 여행을 가자. 20대 후반이나 되어서 남친이랑 여행도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까짓것, 부딪치면서 알아가 보자.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여행을 가자고 하니 L은 당황했을까? 덥썩 물었다. 심지어 아는 동생이 해외 리조트에서 취업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숙박비가 무료라는 것이다. 다만 동생 본인은 아직 취업 전이라 한국에 있고, 사장님은 리조트에 있으니 본인 이름을 대면 숙소로 안내해줄 거라고 했다. 해외여행 경험이 거의 없는 첨지는 그것이 그린라이트인 줄 알았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 공항에서 비행기까지 향하는 길 내내 첨지와 L은 깨를 볶았다. 누가 보면 신혼여행 가는 줄.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도착한 곳에 사장님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 리조트의 사장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리셉션 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약자 이름이 영어라 스펠링이 틀렸나? LEE로도, REE로도 시도해 봤다. 요지부동이었다. 동생도 연락이 잘되지 않았다. 첨지는 머릿속이 꽃밭인 채 멀뚱히 리조트 로비에 앉아 L을 기다렸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동남아에서 L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빠만 믿으라고, 비행기삯만 준비하라고 큰소리 짱짱하게 치고 첨지를 데려왔단 말이다. 숙소 예약이 잘 되었는지 체크해 볼걸. 호수라도 알려 달라고 미리 물어볼걸.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동생을 믿었다. 심지어 이게 첫 여행인데,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표정을 관리했다. 차일 때 차이더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


“동생이랑 통화했어? 뭐래?” 낭창하게 묻는 첨지에게 L은 젠틀하게 말했다. “아, 오늘 누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가셨다나 봐. 연락이 잘 안 된대. 오늘은 일단 우리 돈으로 하루 묵자. 내일 다시 연락해 보지 뭐.” 오금이 저렸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자, 이제 차일 타이밍이다. 첨지, 네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탓하지 않으마.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첨지가 대답했다. “웅! 그러자! 너무 피곤해~ 빨리 들어가자, 오빠. 여기 리조트 너~무 예쁜 거 있지!”


둘은 집에 돌아가는 그날까지 숙박비를 계산했다. 여행 기간 동안 L은 인근 관광 코스를 돌며 그 리조트의 사장님 이름이 동생이 알려준 이름인지 아닌지 재차 확인했고,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은 취업 사기를 당할 뻔했으나, L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천지분간을 못 하는 첨지는 L에게서 명탐정 코난을 느꼈다. 이런 사내는 처음이었다. 짜릿했다. L은 자신을 내치지 않고, 되레 여행 내내 멋있다며 떠받들어 준 첨지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준비성 없는 L과,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첨지는 환상의 짝이었다. 연애에서 결혼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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