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누가 케르베로스지?
머리가 세 개 달린 케르베로스와 살다 보면, 평범한 머리 한 개짜리 인간도 얼추 케르베로스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바쁜 아침에 H가 옷방에서 코디 놀이를 하는 동안, 밖에서 첨지는 시계를 보며 불안함에 휩싸인다. 당연히 H를 재촉한다. “그만 갈아입고 나와라!” H는 첨지의 날 선 목소리에 수긍하는 대신, 케르베로스로 변신을 택한다.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새로 산 바지가 불편하단 말이야! 갈아입어야 한다고!” H가 세 개의 성난 입에서 횃불을 뿜어낼 때, 첨지는 거대 방패로 막아내며 더 큰 소리로 추궁한다. “그럼 아직 바지도 안 입었다는 거야?! 옷방에 들어간 지 언젠데!!” 고성이 몇 차례 오간 뒤 볼멘 얼굴로 나오는 H. 일단락된 건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정작 첨지가 해야 할 일은 잊었다는 것. H에게 오전 약을 먹이는 일 말이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을 잊는 것. 시간 체크를 엉뚱하게 해서 날려버린 기차표, 지금 당장 써야 하는데 배터리가 방전된 삼성 패드, 탄 내가 나서 황급히 주방에 갔더니 발견한 화석 직전의 찐 옥수수. 그런 것들이 첨지의 현실이다. 그럴 때면 늘 H는 첨지를 향해 말한다. 엄마도 목 주변에 머리가 여러 개 보인다고. 난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고. 첨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인다. 희미하게 웃는 것을 선택한다.
그날의 케르베로스 동기화는 한창 저녁 준비를 하던 중 일어났다. 첨지가 선택한 메뉴는 된장찌개. 호박과 두부, 홍고추 같은 재료들이 필요했다. 미리 마트에 다녀와 모든 것을 넉넉히 준비했다. 첨지는 여유 있게 손질을 시작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감자를 쥐었을 때 H가 외쳤다. “엄마! 이 문제 모르겠어!” 그렇다. H는 한창 수학 문제집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첨지가 옆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찌개를 끓이지 않으면 H는 굶어야 하는데? 이런 걸 내적 갈등이라 부르는구나.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살짝 망설였다. 첨지는 둘 다 하는 길을 선택했다. 찌개를 끓이며 H가 모르는 문제를 봐주기 시작했다. 된장을 풀다가 한 문제, 양파를 썰다가 또 한 문제.. 약효가 풀린 H는 문제가 안 풀릴수록, 찌개 향이 짙어질수록 짜증을 냈다. 첨지도 덩달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러다 찌개를 망칠 것 같았다. “아니, 생각을 하라고! 그렇게 넘겨짚지 말고!” 첨지가 먼저 데시벨을 높였다. 케르베로스가 된 H도 질 생각은 없었다.
“아, 엄마 잠시 마트 다녀올게. 팽이버섯 깜빡했다.” 첨지가 먼저 브레이크를 걸었다. “너도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보자.” 10년 차 케르베로스 엄마답게 잠시 휴식을 선언한 첨지. 산뜻한 호흡으로 말했지만, 복잡한 속을 들키지 않으려 서둘러 집을 나섰다. 도망치듯 온 마트에서 팽이버섯을 고르는 동안, 첨지의 머릿속에는 온통 ‘왜 항상 누군가에게 쫓기듯 종종거리며 찌개를 끓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밖엔 없었다. 그러느라, 둘째 J의 하원 시간을 잊었다.
“팽이버섯 세 개 1,000원입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점원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도 못한 채 팽이버섯 세 개를 호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었다. 카드를 받아 들자마자 뛰어야 했다. 이 엄동설한에 J가 혼자 첨지를 기다려선 안 될 일이다. 아직 유치원생인데, 하원 셔틀 시간을 잊다니. 이 무슨 업무태만인지! 첨지는 이렇게 또 잊고, 또 자책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셔틀 선생님께 석고대죄 후, J의 손을 잡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첨지. 여기가 집인지 마트인지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첨지가 없는 동안 H는 집에서 홀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학 문제집을 찬찬히 풀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첨지를 바라본 H가 물었다. “엄마~ 팽이버섯 잘 사 왔어?” 응..? 아, 맞다. 팽이버섯 사러 나간 거였지.. 황망히 호주머니를 뒤진 첨지가 꺼낸 것은 팽이버섯 두 개뿐이었다.
“H야, 엄마가 분명히 팽이버섯을 세 개 샀는데, 하나가 없어졌어. 어떻게 된 거지?” “으휴, 엄마. 급하다고 막 뛰었어? 길에 흘렸나 보다!” 그럴 리가.. 첨지는 괴로웠다. 이제는 하다 하다 돈 주고 산 것까지 다 흘리고 다니는구나, 드디어 갈 데까지 갔구나. 팽이의 늪에 빠진 첨지는 H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H는 첨지의 표정을 보고는, 익숙하다는 듯 꼭 안아주었다.
“엄마, 괜찮아. 잃어버릴 수도 있어.”
첨지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어느 정도는 뭔가 잃어버려도 괜찮다는 것.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H가 처음이었다. 첨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첨지도 H를 꼭 껴안았다.
“그런데 엄마, 팽이버섯 하나에 얼마였어?”
“그냥 세 개 천 원이었어.”
“그러면 하나에 얼마인 거야?”
“그건 이제 네가 계산해 봐. 쉽잖아”
“악! 또 수학이야!”
선천적 케르베로스인 H와 후천적 케르베로스인 첨지의 대환장 콜라보로 오늘은 330원어치 팽이버섯을 잃었다. 대신 왕 큰 포옹을 얻었으니, 오늘도 일단은 만족이다. 참, 찌개는 성공적이었다. H는 두 그릇, J는 한 그릇 반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