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상황을 급박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면..?
외출을 앞두고 가족 모두가 바쁘다.
오늘은 모처럼 할머니댁에 놀러와서, 다들 마음이 붕 떠있다. 맛있는 간식과, 종일TV시청권이 보장되는 파라다이스. 이곳이 바로 할머니댁이기에 H도 J도, L도 저마다의 꿈을 꾸며 할머니 댁에 간다.
오늘의 이벤트는 아침 밭에 가는 것이다. 특별이벤트 스케줄이 잡히면 최첨지의 마음도 덩달아 붕 떠오른다. 서울경기권에서는 1인당 2만 원이 훌쩍 넘는 블루베리 따기, 밭일하기 체험 등이 이곳에서는 무료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시간제한 없이! 이것이 바로 할머니 댁의 맛이 아닐까.
할머니, 할아버지, L, J, 첨지가 바쁜 사이 단 한 사람만이 고요하다. H다. 아침부터 시작된 '미니특공대'에서 아직 마음을 거두지 못했다. (H는 10살이다.) "밭에 가자!"는 할머니의 말씀을 못 들었던 걸까? 첨지는 한 번 더 힘주어 말한다. "H야! 너도 이제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준비해야지? 밭에 가면 모기 많으니까 긴바지 입어야 해!" H는 답이 없다. TV에서는 아직 미니특공대가 햄버거 악당에게 당하고 있다. 빨리 저 햄부기부기같은 악당이 쓰러져야 H도 일어날텐데, 아직도 미동이 없다.
첨지는 안다. 지금 첨지가 개입해야 할 타이밍이다. TV를 끄고, H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응시하며 지시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할머니 댁에 와서까지 이 수고를 혼자 짊어지고 싶진 않다. 어른이 첨지를 빼고서라도 세 명이나 더 있는데, 여기서만큼은 첨지도 그냥 가뿐해지고 싶다.
가족 모두가 준비를 마쳤다. 할아버지가 TV를 끈다. H는 아쉬워 한다. L이 1차 폭발한다. "너 빼고 다 끝냈어! 뭐하는 거야!" H는 화장실에 간다. "쉬만 하고 준비할게요~" 소변을 보면서 H가 휘파람을 분다. L이 2차 폭발한다. "지금 J도 혼자 준비를 다 끝냈는데! 할머니까지 다 널 기다리는데! 여유가 있어?!"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을 고려해 첨지가 쿠션어를 덧댄다. "그래 H야~ 지금 휘파람 부는 건 건방져 보여. 이렇게 바쁜 시간에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야."
H가 한 마디 한다. "엄마, 바쁠수록 돌아가는 거야."
쉴드를 중지한다. 첨지는 포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