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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씨네 Jun 30. 2020

<경계선>, 알리 아바시 (2018)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불편한가

영화 <경계선>의 한 스틸컷, 티나와 보레의 만남

출입국 세관 직원인 티나는 특이한 외모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불쾌감을 주는 그의 외모로 인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냄새’로 사람들의 감정을 읽는 티나는 사람들의 수치심, 분노, 죄책감 같은 감정의 냄새를 맡고 들여오면 안 되는 것을 몰래 숨기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잡아낸다. 여느 때와 같이 일하던 중 티나는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보레를 만나고 그를 통해 티나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경계선’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제목처럼 영화의 장르 또한 경계가 모호하다. 북유럽 신화 속의 트롤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를 가진 주인공 티나(판타지), 그에게 찾아온 보레라는 남자의 등장(로맨스), 그리고 티나가 좇는 범죄와 보레의 반전(스릴러)이 시간 순서에 따라 하나씩 드러나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티나는 우연히 아동 성범죄자를 잡기 위해 경찰과 함께 일하게 되고 그러던 중 자신이 사랑에 빠진 보레가 그 사건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보레는 티나에게 인간들의 비겁하고 저열한 모습을 알려주면서 자신과 함께 떠나길 요구하지만 티나는 인간들의 사회에 남기로 결심한다.


영화 <경계선>의 한 스틸컷, 외로움에서 벗어난 티나의 모습(오)


이 세상에 태어난 트롤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인간 사회에 남아 외로움을 택하느냐; 인간 사회를 떠나 인간들에게 복수하며 죄책감, 분노,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보레는 후자를 택했고, 티나는 전자를 택했다. 티나가 외로움을 가지고 가면서 까지 인간 사회에 남기를 바란 이유가 무엇일까. 티나가 보레와 함께 떠났다면 티나는 평생 수치심의 냄새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티나는 그 ‘냄새’가 싫었던 것이다. 티나가 보레를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보레의 ‘냄새’를 알고 있었지만 이를 모른 척하고 외로움에서 벗어나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난생처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자 티나는 본능(후각)마저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냄새는 씻을 수 없는 것이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평생을 홀로 싸워야 했던 외로움이지만 티나에게는 외로움의 냄새보다 죄책감의 냄새가 더 싫었던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한 스틸컷, '동익'은 '기택'의 냄새가 싫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냄새’가 나온다. <경계선>에서 냄새가 범죄자와 선량한 시민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면, <기생충>에서 냄새는 가난한 자의 냄새로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경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생충>에서도 냄새는 지울 수 없으며 사라지지 않는다. 냄새란 도대체 무엇일까.


영화 속 인물들을 시각적인 감각으로 나누면 ‘트롤’과 ‘인간’이 된다. 여기에서 티나는 전자다. 그렇지만 후각적인 감각으로 인물을 나눈다면 ‘범죄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된다. 곧, 냄새(후각)는 본질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줄 아는 동물을 인간이라고 본다면 전자는 ‘비인간’, 후자는 ‘인간’이 된다. 보레는 전자고 티나는 후자다. 결국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과연 티나와 아동 성범죄자 중에서 누가 더 인간에 가깝냐는 것이다. 겉모습으로는 티나는 인간이 아니고 아동 성범죄자는 인간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본질은 겉모습에 있지 않다. 티나는 죄책감을 느낄 줄 알고 수치심이 뭔 지 아는 인물이다. 무엇이 옳은지 아는 티나는 그의 외모와 상관없이 ‘인간’인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알리 아바시는 이란 태생으로 노르웨이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다. 이란 태생의 감독이 북유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며, 그 역시 티나와 같은 선택(외로움)을 하고 북유럽 사회에 남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결국 티나가 받는 사람들의 눈총은 사실 알리 아바시가 평생을 싸워야 했던 인종차별인 것이다.


관객들은 영화의 오프닝부터 티나를 계속 보고 있지만 그의 외모에 적응할 수 없어 불편하기만 하다. 어딘가 나와 다른 모습에 이유 모를 불쾌함까지 느낀다. 그런데 과연 티나가 트롤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나 불쾌해하는 것인가? 아니다. 사람들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도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이는 성차별,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 등 사회의 각종 소수자 차별로 이어진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티나의 본질이 ‘비인간’이 아니라 ‘인간’이었듯 사람들이 겉모습이 아닌 그 본질을 보는 사회가 되길 바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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