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교재
농장으로 가는 길, 마주하는 나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다양한 수종과 수령의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보이는 건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르다. 어느 날엔 심은 지 얼마 안 된 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어떤 때는 동네 어르신들의 어릴 적 놀이터가 되어준 커다란 나무들이 말을 건네 온다. 커다란 참나무들은 영글어진 도토리를 툭툭 떨어 뜨린다. 요즘은 시세가 좋아 부지런한 아주머니들의 쏠쏠한 용돈 벌이가 된다. 겨울잠을 준비하는 동물들에겐 소중한 양식이다. 사람과 동물에게 편견 없이 먹을거리를 내어 준다.
분주히 오가는 시간 속에서 조금이나마 여유와 쉼의 순간을 맛보게 해주는 것도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이다. 늘 반갑고 고마운 친구들이다.
나무는 속이 깊고 넓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당산나무는 모든 마을 사람들을 품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늠름함을 자랑했고, 마을을 상징하는 얼굴이 됐다.
일에 지친 농부의 땀방울을 식혀주며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는 주막이 되었고, 동네 아이들의 무례한 발길질과 생채기 내는 장난질도 기꺼이 받아 주었다. 어두운 밤길엔 나그네의 발걸음을 밝혀주는 등대였다.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들이 넋두리를 쏟아내도, 술에 취한 어르신들의 회한이 서린 푸념도 뒷말 없이 모두 받아 주었다. 억울한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도 다 들어주는 넉넉하고 든든한 나무가 지금도 마을 곳곳에 말없이 서 있다. 우리 사회와 지역에 나무와 같은 사람이 그립다.
나무는 차별하지 않는다.
늘 그 자리에서 어떤 편견과 차별 없이 모두를 동등하게 대해준다.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품어준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준다. 비바람도 거뜬히 견뎌내며 모두의 그늘이 되어 주고 아무 조건 없이 묵묵히 지켜봐 준다.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들이 나무와 같다.
나무는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나무는 겸손하다.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의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한다. 가장 좁고 어두운 곳에서도 생존의 몸부림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로, 옆으로 자기만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자신들의 일터에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업무에 임하며 다른 사람과 물건, 공간을 빛나게 해주는 분들의 수고가 나무와 같다.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나무를 닮은 사람들이 많다.
도로를 거침없이 달려준 차의 묵은 때를 벗겨 내고자 손 세차장을 찾았다. 커피 한 잔의 온기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눈길은 자연스레 세차하는 분들에게 머물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차량의 구석구석을 씻어내고 닦아내는 날렵하면서도 섬세한 손놀림이 불쑥 마음으로 전해져 뭉클했다.
학교나 관공서는 물론, 어느 건물을 가던 그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꾸는 분들이 계신다. 이곳저곳을 쓸고 닦는 손들이 있어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간이 탄생한다.
아파트나 건물을 관리하고 지켜 주는 경비원 아저씨의 존재는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가.
새벽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른 시간, 읍내를 지나갈 때 마주하는 청소하시는 분들의 모습은 고귀하다. 유난히 청결하고 정돈된 휴게소 화장실을 볼 때마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궂은 환경에서 땀 흘리는 분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일터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의 모습은 든든하고 고결한 나무와 같다.
나무는 이정표가 되어 준다. 자신의 분수에 맞게 딱 그만큼의 크기와 넓이로 살아간다. 나무는 자신의 어떤 모습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삶이라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아낌없이 주고 가라 한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영역에서 누리던 거만한 역할과 오만함, 만용의 어리석음을 나무가 일깨워 준다. 어느 날, 한 줌의 재가 되어 마지막 머무는 자리를 찾아야 할 때, 미리 받아 주기를 청해 두었던 그 나무 밑에 가만히 깃들고 싶다. 한 사람의 생이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면 그보다 더 거룩하고 값진 삶은 없으리라.
농촌에서 나무는 인문학 교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