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 앞에 앉아도 스틱을 잡을 수 없었다. 책을 펼쳐 놓아도 읽히지 않았다. 글쓰기도 힘든 시간들 속에서 며칠을 지새웠다. 꼬꼬들에게 모이를 주면서도 몸과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된 민중가요를 들으며 마음을 다 잡았다. 거리의 요동치는 불빛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찾았다.
긴 겨울밤이다. 추운 날 밖에서 늦게까지 일하지 말라고 해는 서둘러 저문다. 해가 지면 기온은 급격히 떨어진다. 빨리 보금자리로 돌아가라는 자연의 섭리다. 농부는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조그만 방은 우주다. 책들이 있고 드럼이 놓여있다. 성능 좋은 노트북과 대화면 모니터에 괜찮은 음질의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는 곳. 이곳은 쉼터요, 낭만이요, 미래다. 저녁시간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보낸다.
하루를 무사히 끝낸 안도감에 작은 걱정일랑 미뤄두고 잠을 청한다.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꿈같은 일들이 꿈속에서 펼쳐지길 기대하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밤새 안녕!
다시 미명의 시간, 아침을 맞이한다. 밤새 활활 타오른 보일러로 집안은 따뜻하다. 소소한 아침 밥상을 마주한다. 아내와 모닝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알찬 하루를 이야기한다. 하루 일과를 점검하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선다. 볼을 스치는 찬바람이 마냥 좋다. 내게 겨울은 최고의 계절이다. 멀리 산 능선들이 손짓하듯 반긴다. 종일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보일러에 참나무 장작을 집어넣는다. 수레를 끌고 농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짧은 길이지만 푸른 하늘과 잎을 떨군 나무들, 분주한 새들과 반갑게 인사한다. 농장 입구 모퉁이를 돌아 서면 어김없이 애완묘인 가을이가 '야옹' 하며 마중 나온다. 가을이는 늘 한결같다. 벌러덩 뒹구는 가을이의 배를 만져준다. 함께 경사진 오르막을 오른다.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켠다. 난방이 없어도 잘 자고 일어난 꼬꼬들의 밥을 챙겨주고 알을 걷는다. 한 알 한 알 소중하다. 달걀을 선별해 고객들에게 발송한다.
누군가에게서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전화가 온다. 반갑기도 하고 의례적이기도 한 통화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최대한 반가운 목소리로 응대하려 노력한다. 관상보다 더 정확한 게 성상이라는 믿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고하다.
반가운 택배 박스들이 도착했다. 어머니의 김장김치다. 들어 옮기는데 무게가 만만치 않다. 택배기사분께 죄송하고 감사하다. 어머니는 해마다 말씀하신다."올해는 어째 김치 맛이 예전 같지 않다." "쪼끔 보냈으니 그리 알고 묵어라." 어머니의 김치 맛을 언제까지 맛볼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야속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박스 하나는 친구가 보낸 갓김치다. 때때로 보내준다. 김치를 보낼 때마다 친구는 말한다. "어이, 김치가 맛있어서 쪼끔 보냈네." "자네한테 늘 미안 허시." 그 친구가 아프다. 아파도 씩씩한 친구라 더 마음 아프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다. 친구의 갓김치를 계속 받아먹을 수 있게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멀리 나가 있는 자녀들의 안부가 걱정되지 않은 날들. 아침에 각자의 삶터로 나간 가족들이 무탈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친구와 이웃이 언제든 편하게 만나 밥을 먹고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세상이면 족하다.
누구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누리는 사소함 들이 고맙고 소중하다.
어느덧 짧은 하루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