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만난 사람들-15]
새벽 5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녹차를 마신다. 읽다 접어둔 인문학 서적을 펼친다. 새벽 맑은 정신을 깨우는 고금의 언어와 사유가 여과 없이 스며든다. 어느 날은 시집을 꺼내든다. 읽고 또 읽는다. 활자의 매력 앞에 시인은 충만하다. 원고도 직접 펜으로 쓴다. 하얀 종이에 새겨지는 육필의 자국들이 생명의 언어로 살아남는다.
시인은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살림살이는 가난했지만 마음은 부유했다.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덕분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따뜻한 눈빛과 정갈한 몸가짐, 조용하면서도 지긋한 마음은 시인의 어린 시절을 살찌우는 자양분이었다. 지금의 시인을 만든 팔 할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시인의 꿈은 영어선생님이었다. 학교 가는 게 즐거웠고 공부가 재밌었다. 청운의 꿈은 시골 소녀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그런 시인의 꿈은 중학교 졸업과 함께 멈췄다.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하게 됐다.
간절히 원해도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시인은 책을 읽고 일기와 편지를 쓰며 배움의 갈증을 달랬다.
이른 결혼 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더 해만 갔다. 그 목마름이 시인을 깨웠다. 어느 날 우연히 지역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시인의 삶은 꿈틀댔다. 새로운 전환점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역의 백일장을 휩쓴 시인은 도 단위 백일장에서도 장원을 차지했다. 시인은 더 큰 도전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 나섰다. 교통이 불편해 서울 한 번 오가기 쉽지 않은 시절, 대학로에서 열린 전국 백일장에 참가했다. 10시에 시작된 대회에 한 시간 늦게 도착해 시제를 받았다. 시제를 받고 단 10분 만에 시를 써냈다. 그리고 상을 받았다. 참가할 때마다 수상했고 장원까지 차지했다.
시인은 시에 대한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시제가 주어지면 저절로 시상이 떠올라 하얀 종이 위에 옮겨 적는다. 시인은 사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봐도 다른 면을 생각한다. 오래 보고 깊이 들여다본다. 생각하지 못한 생각을 시로 표현해 낸다.
도장 깨기처럼 지역에서 전국의 백일장까지 섭렵했다. 1995년 정지용 시인을 기리고 역량 있는 시인을 발굴하기 위해 제정한 제1회 '지용 신인문학상' 당선은 시인으로서 당당히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정식 등단으로 시인이 되었지만 시인의 길은 만만치 않았다. 시인은 다시 길을 찾았다. 기성 시인들이 쓴 동시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시인에게 동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 동시의 주제가 됐다. 보이는 게 다르게 보이고 들리는 게 전혀 다른 소리로 들렸다. 동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사과의 길'과 '냄비'가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할미꽃'과 '고무줄놀이'가 동시에 당선되었다. '사과의 길' 동시집에 수록된 '등 굽은 나무'는 지난해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시인은 동시로 시 세계에 날개를 달았다. 창작에 몰두하면서도 시인은 배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사이버대학 문예
창작과를 졸업했다. 뛰어난 시적 감각을 지닌 시인에게 대학에서의 시 창작 수업은 시의 경지를 한 단계 더 올려놓았다. 어떤 날은 한 달에 100여 편의 동시를 쓰기도 했다. 시인의 표현대로 미친 듯이 써 내려간 시들은 굴지의 출판사에서 동시집으로 출간되었다. '문학동네'에서 두 권의 동시집을 냈다.
오가며 마주하는 사물과 생명과 자연의 모습을 동심으로 바라보며 그려내는 시인의 감성과 상상의 세계는 감탄을 자아낸다.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세상의 중심엔 사람과 사랑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선행을 곳곳에 실천하고 계신 마음이 지극하다.
시인은 내게 글쓰기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부족한 글임에도 늘 격려해 주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섣부른 용기를 내 이곳저곳에 주제넘게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시인의 영향이 크다.
시인은 얼마 전 작은 황토 방을 만들었다. 올해는 조그만 마당도 생긴다. 시인이 꼭 갖고 싶었던 공간들이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아무 욕심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욕심 없는 소박한 시인의 마음에도 동시에 대한 열정과 독서에 대한 갈망은 늘 넘쳐난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