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만난 사람들-16]
있는 그대로를 살린다. 본래의 특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가능하다. 갖고 있는 장점을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흔한 것을 흔하지 않게 보이는 솜씨가 탁월하다. 무엇이든 손만 닿으면 작품이 되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냥 알고 있던 나무의 변신이 놀랍다. 한 그루 나무가 한 사람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차갑고 무거운 돌멩이도 맞춤하게 자리한다. 척척 들어맞아 돌담이 된다. 꽃이 피었을 때 꽃을 돋보이게 하는 주인의 마음과 눈썰미에 먼저 감탄사가 나온다. 저절로 눈이 즐거워진다. 처음부터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각각의 특성을 살려 주변의 돌과 나무와 꽃들은 자연스레 예술 작품이 된다.
마법처럼 변신하는 사물들이 경계를 서는 공간 안에 그분의 거처가 있다.
은촌 선생님은 가까운 곳에 계신다. 직접 지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셨다. 지금은 은퇴 후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전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목사님으로 불리는 걸 원치 않으신다. 종교를 초월해 스님, 신부님들과도 자연스레 교류하시며 삶의 사유와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신다. 은촌 선생님은 '사경'을 하신다. 사경은 경전을 베껴 쓰는 행위를 말한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비롯한 불교 경전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먹을 갈고 붓으로 써 내려가셨다. 크고 작은 작품들이 쌓여갔다. 조용히 쓸 뿐 내세우지 않았다. 얼마 전 뜻있는 분들이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를 마련해 그동안의 역작들이 빛을 봤다.
은촌 선생님을 만나면서 소나무에 눈을 떴다. 소나무는 흔하고 가까이 있어 그 가치를 소홀히 했었다. 선생님은 모든 소나무를 작품으로 만드셨다. 나무 중 가지치기에 가장 까다로운 게 소나무다. 그만큼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 댁 주변엔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많다. 선생님의 손을 거친 소나무는 서 있는 자리에서 최고가 된다. 전지를 끝낸 소나무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멋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서 있다.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생님의 소나무들을 보며 소나무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소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가 사람처럼 각각의 모습과 성향을 가지고 있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단풍나무, 산수유, 쥐똥나무, 찔레꽃 등 선생님 주변에 있는 모든 나무들은 기막힌 자태를 뽐낸다. 나무들의 본질과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살려 주는 선생님의 솜씨를 눈썰미 좋은 아들이 전수받았다. 농대를 졸업하고 작은 식물원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은 지역 곳곳의 소나무 전지 작업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나는 아직 서툴러 전지가위만 만지작 거릴 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은촌 선생님은 토담집도 직접 지으셨다. 아궁이를 만들고 벽은 황토 벽돌로 조적했다. 벽돌 바깥에 돌을 쌓아 단열을 보완하며 외관을 단단하게 했다. 화장실과 주변 조경도 직접 하셨다. 돌담을 쌓는 기술도 최고다.
무수히 많은 돌무더기에서 맞춤한 돌들을 골라 옮겨가며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시는 모습은 경건한 수도자의 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에 조금씩 조금씩 쌓아 올린 돌담도 작품이다.
얼마 전에는 댁 주변에 황톳길을 만드셨다. 누구든 와서 걸으며 건강을 지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정작 선생님은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 몸과 마음이 흔들리고 계신다.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음에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는 건 아직 못다 이룬 꿈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이루고자 했던 일들을 알고 있기에 위로만 드릴뿐 어떤 도움도 못되고 있다.
선생님은 내게 많은 것을 주셨다. 재주가 부족하여 주신 만큼 활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늘 배우고 노력하여 하나하나 만들어 가려 한다. 보이는 것들을 그냥 보이게 하지 않는 특별함을 실천하고 싶다.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는 것들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는 마음을 키우는 일부터 시작이다.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가면서 은촌 선생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방향을 따라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