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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Nov 01. 2023

옆에 있네

가야 할 길이

앞만 보며 달려가는 세상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로 능력의 잣대를 삼는다. 때론 속도를 내는 것도 모자라 폭주한다. 덩달아 앞을 보며 무조건 쫓아간다. 따라잡아야 한다. 멈추면 뒤처지는 것이다. 뒤돌아보면 밀려난다고 다그친다.


왜, 무엇 때문에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간다. 어느 순간 그렇게 가다 보면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길과 마주한다. 시간마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막연하게 달려온 세월 속에 남겨 놓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은 허허롭다. 그제야 애써 뒤돌아 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오지만 어찌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은 야속하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읊조리는 소리만 허공으로 흩어진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날들이지만 오늘 하루가 삶의 절정이다. 매일 아침 떠오른 해는 모두에게 선물을 한 움큼씩 가져다주는 것이라 한다. 옆을 본다는 건 오늘 하루를 제대로 살아내려는 노력이다. 옆을 본다는 건 현재를 바로 보는 것이다. 현실을 파악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늘 마주하는 현상들을 내 안의 일상으로 끌어들여 제대로 보는 것이다.


몇 해 전 어느 지자체에서 청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던 ‘청년 마음 건강 박람회’ 주제는 “옆을 봐, 우리가 있어!”였다. 인생 선배와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청년들은 옆을 봤을 때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마음이 치유되는 소중한 시간과 마주했다.


옆을 보면 내 아이가 보인다. 지금 고민하고 방황하며 갈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말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들린다. 꿈꿀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막연한 미래를 위해 앞만 보며 달려가라 채찍질하지 말고 옆에 있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멀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깊고 넓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자. 옆을 보면서 둘러보고 쉬어가도 된다는 믿음을 주면 아이는 스스로의 길을 찾아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옆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가족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함께 가야 할 사람, 손 내밀어 일으켜 세워야 할 사람, 손잡아 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사람이 보인다. 가눌 수 없는 아픔과 말 못 할 억울함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은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 줄 바로 옆 사람이다. 마음을 보듬어 줄 단 한 명이라도 옆에 있으면 된다. 울고 싶을 때 부둥켜안고 울 수 있는 옆 사람이 있다면 거뜬히 털고 일어설 힘을 얻는다. 억울함에 몸부림칠 때 묵묵히 들어주며 토닥여 주는 옆 사람의 존재는 구원이다.


옆을 본다는 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채워가는 가치의 근거를 찾아가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다. 옆에 있는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옆을 본다는 건 앞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다.


옆을 보면 나지막한 산이 보이고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이며 펼쳐진 들이 보인다. 사시사철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오묘함과 제각각의 모습으로 삶의 터전을 누리는 뭇 생명들이 외치는 공존의 함성이 들린다.


속도와 편리와 경쟁은 앞에 가는 이들이 만든다. 따뜻하고 위로가 되며 더불어 가는 미래는 옆을 보는 이들의 배려와 나눔과 살핌에 의해 만들어진다.


늘 앞만 보며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각오 대신, 천천히 옆을 보며 가보리라 다짐한다. 앞에 있어도, 뒤에 있어도 늘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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