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마음 들지 않게!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게!
귀농하면 개를 키우고 싶었다.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놀며 함께 산책하고 집도 지켜 주는 듬직하고 멋진 개를 찾았다. 천연기념물 368호인 삽살개였다.
시골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삽살개를 분양받기 위해 이곳저곳 탐문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우리가 찾는 맞춤의 삽살개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들뜬 마음에 연락을 하고 만나러 갔다. 강아지라 생각하고 조그만 상자를 준비해 갔다. 도착해서 마당을 보니 부견인 황삽(갈색 삽살개)과 모견인 청삽(검은색 삽살개)이 뛰놀고 있었고 주변엔 꽤 큰 자견들 네 마리가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순간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강아지인데 크기가 웬만한 개들의 성견만 했다. 가져간 상자를 내리지 못했다.
중후한 어르신과 가족들이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삽살개를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통하는 뭔가가 있다. 태어난 지 3개월 된 강아지들은 아직 이름이 없었다. 그냥 1번부터 4번으로 불렸다. 마음에 드는 녀석을 고르라고 했다.
서로 의논하여 2번으로 결정했는데, 정작 불러도 오지 않고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오히려 4번이 뭔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며 다가왔다. 우리는 주저 없이 4번을 선택했다. 가져간 상자는 너무 작아 제공해 주신 넉넉한 공간에 황삽인 4번을 데려왔다.
이름은 마을 지명인 강산리에서 따와 '산'이라고 지었다. 그렇게 황색 삽살개 4번은 한 가족이 되었다. 삽살개 보존협회에 등록도 하고 혈통서도 발급받았다.
삽살개는 분양과 입양이 까다롭다. 천연기념물인 만큼 제대로 관리, 감독되고 있다. 삽살개를 키우기 위해선 분양 협약 및 입회서를 (사)한국 삽살개 보존협회에 제출해야 한다. 교배와 자견의 등록도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삽살개는 신라시대부터 기르던 견종으로 대표적인 우리나라 토종견이다. 귀신과 액운을 쫓는 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민화나 가사, 민담등에 자주 등장하는 친근한 견종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들이 방한복을 만들기 위해 털이 길고 두툼한 삽살개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였고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다.
1960년 대부터 보존되기 시작하였고 1992년에 천연기념물 36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경북 경산시에 있는 삽살개 육종 연구소에서 전문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산이는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생김새도 멋지고 영리하며 용맹스러웠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이라 보안과 안전에 취약할 수 있었지만 산이가 온 이후엔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산이의 짖는 소리로 우리는 집안에 있으면서 어떤 사람이 들어오고 지나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한번 왔다 가더라도 우리가 반갑게 맞이한 사람들은 알아봤다.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짖는 소리의 강약으로 알려 줬다.
지나가는 사람도 산이의 눈에는 모두 다르게 보였지만 어떤 사람인지 거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눈치도 빠르고 애교도 넘쳤다. 인내심도 강하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최고였다.
어느 정도 성견이 되어 짝짓기를 해주려고 적당한 수컷을 찾아 나섰다. 삽살개는 짝짓기를 할 때 반드시 혈통서를 확인해야 한다. 까다롭게 상대를 찾았다. 연하였다. 체격도 산이 보다 작았다. 여러 차례 만남을 갖고 노력했으나 산이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헛물만 켜다가 결국 실패했다. 안타깝게도 산이는 후견을 남기지 못했다.
어느 날, 산이가 집을 뛰쳐나가 마을로 내려갔다. 찾으러 가는 길에 만난 동네 형님이 자기가 풍산개를 두 마리 기르고 있는 데 엄청 사납다며 삽살개가 그쪽으로 달려가 걱정이라고 했다. 큰일이다 싶어 그 형님 댁으로 뛰어갔는 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산이는 우렁찬 목소리로 짖어대고 덩치가 큰 풍산개 두 마리는 집으로 숨어들어 납작 엎드려 있었다. 뒤에 도착해서 그 광경을 본 형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며 멋쩍어하셨다. 산이를 달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뿌듯하고 당당했다. 용맹한 산이의 무용담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산이를 키우면서 가장 미안한 것은 산책을 제대로 시켜 주지 못한 것이다. 자주 데리고 나가지도 못하고 묶여있는 시간이 길었다. 긴 털이 매력인데 털관리도 제대로 못해 주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눈만 마주치고 지나친 적도 많았다. 밥과 물만 주면서 주인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산이의 외로운 시간도 점점 길어졌으리라.
자라면서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눈에 띄게 약해지는 게 보였다. 긴 털을 휘날리며 사자처럼 달리던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다. 눈도 어두워졌다. 얼마 전 털을 예쁘게 깎아 주고 빗질도 해 주었다. 나이는 먹었어도 여전히 털은 윤기 나고 풍채는 멋졌다.
산이의 사료가 거의 떨어져 다음날 사다 주리라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먹이며 산이가 멀리 갔다고 알려왔다. 외출할 때마다 산이에게 어디 갔다 오는지 알려 주던 아내가 옆으로 누워 꼼짝 않고 있는 산이를 발견한 것이다. 울컥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 14년을 함께 한 산이가 멀리 떠났다. 우리 가족들에게 즐거움과 행복만 남겨주고...
잘 대해주지 못하고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한 회한이 밀려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떠나간 산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주지 못한 많은 것들만 떠오를 뿐, 그렇게 보내야 하는 현실이 마음을 짓누른다.
가만히 기도한다. 다음 세상에는 더 좋은 인연으로 돌아오기를.
늘 가까이 있는 이들과의 뜻하지 않은 이별 앞에, 어쩔 수 없는 헤어짐에 절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미안하다는 말은 언제 해도 늦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이해하고 보듬으며 사랑하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