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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담 Dec 28. 2023

-농부의 정년-

은퇴는 어려워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텅 빈 들판은 열심히 달려온 한 해의 온전한 쉼을 보여준다.

봄부터 생명의 씨앗을 품은 땅이 농부의 땀방울을 만나 결실을 맺고, 다음 해를 기약하며 넉넉한 휴식에 들어갔다.

영양분을 무한대로 쏟아부어도 생명의 근원인 땅에겐 휴식이 최고의 보약이다. 새로 움틀 싹들에게 더 많은 양분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겨울잠에 들어간 뭇 생명들도 고요하다. 한 줌 모이를 찾아 마른 나뭇가지 사이를 빠르게 오가는 새들의 지저귐만 요란하고 부산스럽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다.  농부가 쉬는 것이 아니라 땅이 쉬어야 농사가 잘 된다.          


농부는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다. 자연과 땅이 농부를 멈추게 한다.  농부의 숙명은 일하는 데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농사일에 매뉴얼은 사라져 가고 있다. 절기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시절은 먼 옛적 흑백사진 속에 존재하는 낯선 풍경이 되었다.


새로운 종자, 새로운 농법, 새로운 작물, 새로운 질병, 새로운 방제, 새로운 시설에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심술까지 더해진 농업 환경은 팍팍하고 매정하며 가혹하다. 끊임없는 공부와 자본과 기술을 요구한다. 요행까지 바라게 되는 농업 현장이다.


농부는 새롭지도 않고 변덕스럽지도 않다. 농부는 우직하고 순박하다. 그래서 농사가 힘들다.


마음은 청춘이건만 몸은 이곳저곳에서 현실을 바로 보라며 삐걱댄다.

시간을 부정하고 타협을 거부하며 힘을 써봤자 돌아오는 건 아픈 몸뚱이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 괴로워지는 건 자신이다. 빨라지는 세월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갈수록 버거워지고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직 자만과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생명이요, 삶의 터전인 대지가 잠시 숨을 고를 때 어쩔 수 없이 농부도 쉼 없이 달려온 한 해를 마무리하며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다.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살아내며 버텨 나가는 게 농사꾼의 삶이다. 이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저리고 당긴다.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부는 늘 말한다. 농사는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고. 찬 겨울 논과 밭이 휴식을 취하는 이맘때가 되면 농부는 또 다짐한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이제 농사는 진짜 끝이거나 확 줄여야겠다고 굳세게 마음먹으며 기어이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선포한다.      


겨울의 절정에서 한낮의 햇살이 따사로우면 여기저기 한가하고 느린 발걸음으로 마실을 다니며 한껏 여유를 부린다. 당연히 누려야 할 호사지만 왠지 어색함은 감추기 힘들다. 괜히 시간은 느리고 하루하루는 무료하다.     

겨우내 아랫목에 군불을 지피며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 되면 농부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다시 깨어난다. 읍내 곳곳에서 받아온 농사용 달력을 꺼내 놓고 이젠 잘 맞지도 않은 절기를 짚어가며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야무진 새해 농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전히 밖은 엄동설한이다. 대지는 보란 듯이 하얀 솜이불을 덮고 있다.     

      

본능적으로 조바심이 난 농부의 마음은 빨리 언 땅이 녹기를 기다린다. 마음은 벌써 퇴비를 뿌리고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며 씨앗을 뿌리는 콩밭에 가 있다. 지나온 시간이 심어주고 키워낸 농부의 본성은 온전히 몸에 익은 경험과 감각으로 되살아나기에 이성으론 어쩌지 못한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농사꾼의 경험을 무색하게 한다. 대책 없는 정부의 정책은 농부를 화나게 한다. 널뛰는 농산물 가격은 농부의 힘을 빠지게 한다. 치솟는 자재비와 인건비, 인력난은 농부를 좌절하게 한다. 삐걱대는 팔, 다리는 농부를 주저앉게 만든다.     



해가 갈수록 더 막막하고 기약 없는 시간과 마주한다. 현실은 농사를 그만둬야 하는 이유로 넘쳐 나는데 멀리서 봄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면 농부의 마음은 홀린 듯 잰걸음으로 들판을 향해 내달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 한번 바라보며 부지런히 온 힘을 쏟아붓는다.           


농부가 깨어나 들판으로 나가는 건 숙명이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숭고하고 경건한 의식의 실현이다. 비록 기계화와 대형화의 파고 속에 공장식 대량 생산의 가치만이 우선시되는 시대지만 땅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농부의 부지런한 발걸음과 짠내 나는 땀방울이다.          

 

농부는 계산하지 않는다. 농부는 농사와 관련된 어떤 핑계도 대지 않는다. 어느덧 농부는 하늘의 변덕마저 무심히 받아들이는 초월의 경지에 다다랐다. 자연에 순응하며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다. 진짜 농부는 정직하고 우직하며 겸손하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음을 겨우내 움츠린 몸을 일으켜 세워 일터로 나서는 농사꾼의 순박한 얼굴이 증명한다.


삽 한 자루 어깨에 걸치고, 호밋자루 한 손에 꽉 쥐며, 서슬 퍼런 낫을 치켜든 농부가 가는 길엔 거칠 게 없다. 그 기세에 세월도 흠칫 놀라 잠시 주춤한다.          


멈추고 싶어도 쉬이 멈출 수 없고, 내려놓고 싶어도 마음대로 내려놓을 수 없는 농부의 삶. 농부의 일은 그가 더는 들로 나갈 수 없을 때 끝이 난다. 농부의 정년은 그때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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