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의 가치
지역에 산다는 건 스며드는 것이다. 그곳의 문화와 전통에 녹아드는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몸짓으로 깃드는 것이다. 도시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감추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세우고 싶은 경력을 누르며 사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귀농 2년 차로 접어들었을 때 지역의 귀농, 귀촌 협의회 모임에 나갔다. 도시를 떠나 정착한 곳이 같은 지역이라는 소속감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나이, 성별, 학력, 전직, 고향, 작물등 아는 것 하나 없이 처음 만난 자리. 귀농이라는 쉽지 않은 선택으로 나름 생존의 몸부림을 치며 말 못 할 갈등과 고민에 힘겨워하는 사람과 조금은 여유 있어 보이며 느긋하게 관망하는 이들이 함께 했다. 벌써 몇몇은 친해져 형님, 동생 하며 친분을 과시한다.
명백하게 귀농과 귀촌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귀농은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귀촌은 휴양과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농촌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애초부터 귀농인과 귀촌인들이 같이 모임을 꾸려 간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자체는 귀농, 귀촌 모임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귀농인은 귀촌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어려움을 해소하며 손 맞잡고 협력해 갈 수 있는 자리라 기대하고 나갔다. 처음 나간 자리라 서먹서먹했다. 모임의 좌장 격인 한 분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자고 했다. 그분의 주위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방바닥이 내려앉을 듯 무게를 잡고 계신 분들이 있었다. 각자 소개를 하는 데 내려오기 전의 직업이 모두 화려했다. 공중파 방송국 PD, 영화감독, 대기업 부사장, 신문기자, 고위 공무원, 예비역 장교, 교장, 교감 등등
소개가 끝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에 귀농 6년째인 회원이 마을의 분위기와 마을 사람들과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며 조언을 구했다. 한껏 무게를 잡고 앉아 자신들의 화려한 이력을 내세우던 분들이 정색을 하며 그런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면박을 주었다. 분위기는 싸늘했다. 몇몇은 당황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간 귀농, 귀촌 협의회 자리였다.
가끔씩 들려오는 소문은 역시나였다. 협의회 내부에서 고소 고발이 일어나고, 선거철만 되면 어느 한쪽에 손을 대려고 모임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의 직업과 경력을 활용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공명심이 높으신 분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농촌에서의 삶은 도시에서의 지위와 경험과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논과 밭, 산에서 요구되는 건 백지상태에서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습득력과 실행력, 성실과 겸손, 탐색과 연구, 기록과 관찰이다. 학력이 높다고 농사를 잘 짓는 다면 고학력자들은 모두 성공한 농부가 되어야 한다. 지역에서 만난 농사의 고수들은 우직하고 부지런하며 온전히 몰입하는 분들이었다.
귀농 전, 무엇을 했다고 떠들고 다니면 반드시 이용하려는 사람이 생긴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건 다반사고 어떤 문제든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처음엔 인간관계도 넓히고 좋은 일도 하자는 취지에서 최선을 다한다. 정작 일이 바빠지고 힘들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나 다른 사정으로 도움을 줄 수 없을 때 들려오는 첫마디는 '저 사람 변했다'이다.
성공적인 귀농은 철학 있는 농사로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고 잘 판매하여 소득을 올리며 자연 속에서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는 어디서든 신비감을 준다. 가만히 있어도 농촌에서는 여러 모양으로 자체 검증과 포장과정을 거친다. 나도 모르는 나의 과거가 도시에서의 이력으로 소문이 나기도 한다. 과연 저 사람이 도시에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았는지, 지위는 얼마나 높았는지, 갖고 있는 재산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증이 커질수록 지역에서는 쉽게 대하거나 무시하지 못하는 재밌는 현상이 발생한다.
어디서든 진정한 가치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품위를 지키거나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지나온 이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농사는 이론이 아니다. 농사는 말로 짓는 게 아니다. 농사는 마음으로 짓는다. 농사는 늘 새로운 시작이다. 농사는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농부는 겸손해야 한다.
자연 앞에, 땅과 작물 앞에, 그리고 자신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