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친애하는 한강.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는 편지의 가장 첫 단어로 'Dear.'을 써 온 지는 꽤 오래되었다. 대상에 따라 말을 골라 'To.'를 쓰게 될 때도 여전히 있지만, 주로 내가 편지를 쓰게 되는 대상은 'Dear.'를 마땅히 붙여도 될 만큼의 존재들이므로, 'Dear.'을 자주 쓰게 되는 편이다. 'D', 'e', 'a', 'r' 알파벳을 정성스레 한 획씩 써 내려갈 때 나는 편지지 위로 떠올린 상대를 내가 얼마나 '친애(親愛)'하고 있는지를 마음에 다시 한번 새기게 된다. '친밀히 사랑하는 마음', 그 어찌나 어여쁜 말이고 정다운 마음인가!
Dear. 한강
이라는 호명에 기립박수가 쏟아졌고 한국의 첫 노벨문학상 시상이 이루어졌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지켜보는데 참, 세상사가 모순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내, 그녀가 수상 기념 강연의 후반부에 던진 두 가지 질문―'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이 떠올랐다. 세상은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한편, 또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그녀의 수상이 확정되었다는 최초 보도 시기만 해도, 그녀의 수상 소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니 넘치게 가치 있는 일이었고, 그 사실이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을 한참 떠들썩하게 했다. 때론 세상에 '공공연한 당위' 같은 것을 보란 듯이 외쳐 보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녀의 수상이 내게는 바로 그 '공공연한 당위' 같은 것이었다.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말이 나는 이 '공공연한 당위'랄까. 그녀의 수상은 곧 그녀의 작품들을 향한 찬가이니,
그녀가 그간의 작품 활동들을 통해 이야기한 '마땅히 인간다운 것'의 가치들, 공공연한 당위로 세상사에 존재해야 할 것들이, 그렇게 존재하지 못하는 이 세상에 노벨문학상이란 이름으로 다시 빛날 수 있음이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소년이 온다』를 되새기게 만드는 오늘날 시국 상황에, 때마침 그녀의 노벨문학상 시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적기(適期)이고 시의적절한가. 이쯤 되면 그녀의 수상은 필연적으로 올해였어야만 했었는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는 묻고 싶었다고 했다.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우리를 마침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이 아닌지.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에게 결코 행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무참히, 자행되었던 지난날의 광주. 그리고 그 시절을 다시 부르려 하는 작금의 어떤 이들. 그렇지만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않을 역사. 나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 동호가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 결과로, 죽은 자가 산 자인 우리를 구하고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는 것이라, 꼭 믿고 있다.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지난 두 번의 대선, 오랜 시간 응원해 온 정치인이 있었고 나는 매번 그의 승리를 바랐다. 칭송받던 그의 업적이나 희생 정신과 별개로 정치권에서는 수없이 헐뜯기고 조롱당하기만 하는 그였을지라도, 정치와 국민에 대한 그의 진심과 신념만큼은 결코 빛바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으며, 정치판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을 굳건히 하며, 그를 지지하는 샤이중도파들의 뒷심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실패로 끝난 두 번의 대선이 내게 안겨준 것은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었다. 세상은 온통 썩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람, 정직한 사람, 순정한 사람의 가치를 끝내는 알아줄 거라는 믿음, '약지 못함'에 대한 비난보다 '약지 않음'에 대한 박수를 보내줄 거라는 믿음. 그러나 두 번의 대선은 나의 그 믿음을 흔들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그 믿음을 여태 갖고 살아온 나 자신의 삶이 조금은 파괴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정치판 뉴스와 거리를 둔 지가 참 오래되었다. (이번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탄핵안 표결을 위해 외따로이 떠 있는 섬처럼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선 그의 모습. 내가 사랑했고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진심, 그의 신념이 그 자리에 여전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진심과 신념을 사랑하고 믿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엄마는 어젯밤, 또 한 번 뉴스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저 모습은 정말 가슴이 저릿할 만큼 대단하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선택과 결정이 아니라고. 그렇다. 나는 텅 빈 국회 반쪽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그가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시절은 어두워 오고 하얀 눈은 몰아쳐 오는데, 그 극한의 어둠과 시련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기꺼이 온몸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 감내하는 그의 모습. 아이러니하게도, 이 국운의 고통 속에서 그가 지켜온 정의와 정직과 순정에 대한 사랑이 다시 생겨난다. 결코 흔하게는 볼 수 없는 갈매나무, 그 소중한 나무 한 그루의 마디 끝에서 다시금 피어나는 꽃을 본다.
나 역시도, 다시 되물어 본다.
세상은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한편, 또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수상자 강연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