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눈, 그리고 그리운 사람.

“볼 수 없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어요.”

by 윤정원

11월 27일. 지난주 수요일, 수도권에는 많은 눈이 왔다. 무려 11월에 올 겨울의 첫눈이 펑펑 내릴 거란 소식에 나는 그 전날 밤부터 들떴던 것 같다. 그래서 고명재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꺼내 들었다. 꽤 오래, 내 책장에 끼워져 있던 책이었다. 그저 고명재의 첫 산문집이라기에 일단 사두고 봤던 책. 그렇지만 여태 읽지 못했던 책.

고명재의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을 좋게 읽었었다. 좋아하는 작가인 박연준이 추천하는 시인이었기에 접해 보았던 그의 시집. 쨍한 노란색 빛깔의 그 시집을 나는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펼쳐 읽기도 전에. 그리고 그 시집에 수록된 시 중에서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가 기억에 남는다. 아끼는 친구에게 이 시집을 선물했을 때 그 친구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던 시, 그래서 나 역시 좋아졌던 시.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11월, 좋아하는 눈. 이 계절, 이 달에 눈이 내린다는 설렘에 가득 차서, 얼마 전 생일선물이라며 친구가 보내준 북시트 위에 책을 끼우고 한 페이지씩 넘겨 읽어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페이지에 실린 문장 하나하나를 쉽게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해, 매 페이지마다 오래 시선을 머무르게 하며 천천히 진도를 뺐다. 이 책을 아껴두고 아껴두다 이렇게 딱 알맞은 분위기에 읽게 된 것이 무한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를 가슴 설레게 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그 문장들은 모두 각기 다르게 생겼지만, 그 모두가 결국엔 다 ‘사랑‘을 말하고 있었기에. 그날밤 나는 온통 사랑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내가 참 좋아하는 어떤 순간이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배앓이를 하듯 자꾸 보고 싶을 때 무채 무채 말하다 보면 좀 나아졌다. 죽은 개들이, 인자했던 할머니 손 끝이, 그렇게 건너온 저쪽, 너머의 존재와 말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쥐고 싶었다.(14-15)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그때까진 용감하게 사랑을 줘야지.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색을 열고 색을 삼키고 색을 쥔 채로 나를 키운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15)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는 문장이,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라는 문장이 특히나 마음을 울렸다. ‘들어가며’의 글인데도 벌써 거기에 멈춰 다음 장으로의 진도를 못 나가게 되었다. 그 페이지를 자꾸만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 문장에 한없이 마음이 가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면, 나도 그런 사랑을 오랫동안 받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는 그 사랑들을, 오랫동안 받아왔다고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고명재의 말처럼,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우게 될 텐데. 그 ‘비움’의 상태에 벌써부터 매몰되지 말고 그때까지 용감하게 사랑을 주겠다는 다짐이, 아름다웠다. 나도 그런 다짐을 하고 싶었다.


책을 절반이 채 못되게 읽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을 한꺼번에 오늘밤 다 읽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며, 그 이후로는 페이지를 랜덤으로 넘겨가며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읽게 되는 문장 하나하나마다 모두 포스트잇을 붙이고 싶어, 이 포스트잇을 붙이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 ‘2023년 5월 고명재’를 끝으로 남긴 ‘나가며’의 글을 마주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이 글을 썼습니다.
마음을 다해 당신 앞에 놓으려고요.

생각해 보면 마음은 한 번도 보인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가시광선 아래에 드러난 적 없어요.

그럼에도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는 아름다운 사실.

그래서 이젠 만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마음에만 존재해도 괜찮습니다.

볼 수 없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어요.

이것은 참 흔하고 놀라운 끈기입니다.
그걸 꽃처럼 쥐고 살아갈게요.(262-263)


그렇다, 볼 수 없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은 참 흔하고 놀라운 끈기라는 말도 맞다. 그 끈기 덕분에, 단 한 번도 가시광선 아래 드러난 적 없는 마음이지만서도 나는 그 마음들을 껴안고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


이 문장을 보며 내가 떠올린 한 사람. 생일날이 되면 내게 안부를 물으며 선물을 보내주던 사람. 몇 마디 안부를 서로 주고받으며 그 표면적 안부의 말 뒤에 숨어 있는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알아차리던 우리. 작년 6월에는 생일이 아님에도 그의 연락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연락이 혹 내게 불편함을 안겨 주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나 역시 너처럼 늘 궁금했다고, 잘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너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고 싶다고, 전화를 해도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너에게 지나간 사람인 나는 그냥 때때로 떠오르는 사람 정도로 남겨두어도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다가도 오늘처럼 문득 연락을 하고 싶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테니 그럴 때는 또 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나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겠다고. 힘들었던 시절에 함께 시간을 공유해 줘서 나야말로 참 고마웠다고. 그 시간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다고. 지금의 내가 꽤 마음에 들고,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젠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마음에만 존재해도 괜찮다고.
볼 수 없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고
나는 이 마음을 꽃처럼 쥐고 살아갈 테니
우리 서로 그렇게 살자고, 이렇게 좀 더 예쁘게 말할 걸 그랬다.


그는 내게 대체 어떤 존재일까. 가끔 그와 나의 인연이 무어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토록이나 끊어지지 않는 그와의 오랜 인연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렷한 답은 없고, 그저 우리는 이런 인연인가 보다,라는 결론만 내릴 뿐이다. 나는 그를 평생 이 마음으로 그리워하겠지. 그렇지만 이 그리움이 다시 그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말의 대체는 아님을 알기에, 나는 이 그리움이 더 이상 절절하거나 아프지는 않다.

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어렵게 끊어냈던 그해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참 아팠던 사랑. 그만큼 너무 많이 좋아했던 사람. 그는 내 삶에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만날 때에도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 자리는 일종의 ‘영구결번‘ 같은 것이어서 누구로 대체되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자리로만 내게 남아 있다.

그가 이토록 내게 중요한 사람으로 남은 것은, 그의 마음이 가시광선 아래에 드러난 적은 없어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그의 마음을 내가 과분할 만큼 전해받았다고 믿는 내 기억 때문이겠다.


이번 생일엔 그의 연락이 없었다.

내심 너무 보고팠는지,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꺼내 읽고 싶었던 건지도.


매거진의 이전글모든 종류의 사랑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