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류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with. 사랑의 이해

by 윤정원

얼마 전, ‘사랑의 이해’라는 이혁진의 소설책을 내게로 와 건네던 사람이 있었다. 독서 클럽을 함께하고 있는 J. (당시에 나는 그의 태도를 ‘건네다’가 아니라, ‘보여주다’ 정도로만 이해했었지만, 결과적으로 J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린 바로는 그것은 ‘건네는 행위’였다.) 책을 양손에 꼭 쥔 채, 미소를 지으며 이 책을 읽어보셨냐고 물어오는 J를 보고,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J에게, 올해가 시작되던 겨울,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고 이야길 한 적 있던가?', '원작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그 내용을 대략 알고 있으니 읽어보았다고 이야길 해야, 이 사람이 덜 실망하려나?' 등등.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들을 껴안은 채로,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드라마 원작 소설인데, 제가 이 드라마를 엄청 좋아해요. 제가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보네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러니 이번에는 J가, 책을 더욱 ‘확실하게’ 건네며, 내가 ‘확실히’ 그것이 ‘건네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본인은 다 읽었다고, 이 책 (빌려) 드릴 테니 읽어보시라고. 책을 빌려준다는 후자의 말보다 내가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책을 다 읽어보았다는 전자의 말이었다.


원작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드라마를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드라마에 관한 이것저것 모든 정보와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다 보니, 드라마화된 스토리라인과 기존 소설의 스토리라인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게 되었다. 나는 종현에 대한 수영의 사랑이 더 깊게 그려져 있는 소설보다 상수에 대한 수영의 사랑이 더 깊게 그려져 있는 드라마의 스토리라인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소설은 결코 넘볼 수 없을 이 드라마만의 섬세한 감성과 분위기, 그 고유한 결을 아주아주 좋아한다. 심지어 드라마의 여운을 깨고 싶지 않아 나는 여태 원작 소설을 읽는 것을 미뤄두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J가, 소설을 다 읽었다며, 싱긋 웃어 보이다니. 내가 좋아한 건 드라마였는데, J가 혹시라도 내가 좋아한 것이 원작 소설이라고 오해를 할까봐. 나는 조금 다급했던 나머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횡설수설했다. 드라마가 훨씬 좋다고, 제가 좋아하는 건 드라마라고(무한 반복), 도서관에 원작 소설을 진작 신청해 둬서 도착해 있다고 그걸 보면 된다고, 드라마 대본집도 사놓고 아직 못 읽어서 그것부터 읽어야 한다고 쭝얼쭝얼. 상대는 묻지도 않은 온갖 TMI를 남발했다. 돌아서 생각하면, 조금은 과하다 싶을 만큼의 부정과 거절. 나라는 인간은 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곁을 좀처럼 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냥, 감사하다, 하면서 빌려 읽으면 될걸.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하고 친해지고 싶어하는 J의 마음을 다 알면서, 나도 한 발짝 좀 더 다가가면 될걸. 그 순간엔 이런 생각들보다 그저, 언제 읽을 지도 모를 책인데 남의 책을 갖고 있게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책이 내 손안에 있다는 이유로 쫓기듯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동할 때, 그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랄까.


책을 가지고 털레털레(적어도 그 순간 내게는 그리 보였다.) 걸어가는 J의 뒷모습을 보자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 혼이 났다. J를 털레털레하게 만든 것은 나다. 상대는 피해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나 역시도 책을 타인에게 잘 빌려주는 사람이면서, 정작 누군가의 책을 빌려 읽은 적이 정말… 거의 없는 나. 상대의 물건을 잠시 동안이라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별나게 미안해하고 불편해하는 나.


일순간 마음은 무거워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요했던 나의 하루에 J가 기분 좋은 파장을 하나 일으킨 것은 분명했다. 그 파장에 대해 곰곰 생각하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도서관으로 가 내가 신청해 놓았었던 신간 도서, ‘사랑의 이해’를 빌렸다. 빌리고는J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덕분에 미뤄둔 숙제를 갑자기 하고 싶어진 거 있죠! 도서관에서 빌려왔어요:)" J의 답장은 또 한 번 나를 일렁이게 했다. 이번엔 보다 더 큰 일렁임. "제가 이 책 선물로 드리고 싶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후퇴했습니다…ㅋㅋ 그거 반납하고 제가 드릴 테니 읽으세요!" 내게 책을 '확실하게' 건네주던 J의 행위가 ‘빌려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물한다'는 의미였다니. 나는 내가 이렇게나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나, 왜 나는 J의 친절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센스있게 대처하지 못했던가. J의 뒷모습이 털레털레를 넘어 쓸쓸해 보일 뻔도 했던 건 나의 착각이 아니었구나. 이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갚지…? 했다. J의 선의를 또 한 번 거절하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았다. 습관처럼 쏟아져 나오는 '괜찮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나는 그럼 책을 교환하자고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드릴 테니, J는 그 책을 내게 다시 선물해 달라고. 다음날, 나는 J와 책을 교환했다. 내가 J에게 선물한 책은 마이클 프레임의 '수학의 위로'였다. J에게 책을 교환하자고 이야길 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박연준 혹은 신형철의 책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책을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지극히 나의 취향인 것 같아 물러두었다. 이번엔 J의 취향을 고려한 책 선물을 해야겠다 싶었다. 나는 J를 아직 잘 모르지만, '수학의 위로'는 내게 있을 때보다 J에게 있을 때 더 빛날 것만 같은 책이었으므로.


"선생님의 글이 좋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1호(?) 팬으로부터." J가 책의 첫 장에 써둔 글. 열어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어젯밤의 나는 왜 J에게 책 선물과 함께 작은 카드를 남길 마음을 접어두었을까, 후회가 됐다. J는 J가 말한 대로,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거침없이 다가가는 스타일은 맞는 듯하다. 관계에 있어 나보다 훨씬 적극적인 사람. 반면, 나는 확실히, 내 삶에 새롭게 등장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일을 지극히 조심한다. 경계를 위한 조심성일 때도 있지만 과한 배려에 따른 조심성일 때도 있다. 내 마음이나 표현이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싶은 마음에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때론 그 주저함들이 수많은 갈대처럼 행렬을 이루어 내 안이 다 쓸쓸해지게 몸을 흔들어 댄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나와 끝끝내 가까워지는 관계가 있다면 나의 갈대숲을 헤치며 뚜벅뚜벅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이.


책의 첫 장에 새겨진 J의 발자국에 크게 마음이 동했음에도, J에게 별다른 감사 인사를 또 하지는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나의 글이 좋다는 그 말이 쑥스러웠달까, 부끄러웠달까. J에게 내 글을 보여줄 기회라고는 한두 번 정도일 뿐이었던 것 같은데, J는 어떻게 내 글을 좋아하기까지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J가 나를 바라보는 나의 크기보다 나는 작은 사람 같아, 글에 대한 칭찬을 받은 것이 내심 좋으면서도 쑥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오고 갔다. 특히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응원하겠다는 말에서 J에게 크게 한 방 먹었다. 나는 J라는 사람을 아직 잘 모르겠는데 J는 이미 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움찔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모든 종류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니까. '사랑' 앞에 '모든 종류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J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인 것 같아 좋았다. 내가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참 폭넓게 좋아한다는 것을. 이 사람은 알고 있구나.




그날 저녁, 나와 J는 야근으로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게 되었다. 차 한 잔을 사주고 싶다는 J의 말에 나는 흔쾌히 카페를 따라나섰고, 우리는 카페에서 잠깐 동안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다.


—내년에도 독서 클럽 같이 해요.

—저는 선생님과 오래갈 인연인 것 같아요? 어때요?


여러 대화들 속에 J가 내게 물었던 이 두 가지 질문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는 J가 원하는 만큼의 똑부러지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해주진 못했던 것 같지만. 그날 밤 하고도 며칠 밤이 더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저 두 가지 질문이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음을 J가 안다면, 이는 그날 내가 한 대답보다야 조금 더 명료하고 진심 어린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10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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