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어디선가 비눗방울이 날리고 있었다. 또 어떤 정신 나간 기지배가 비눗방울을 불고 있는 걸까? 학교에는 참 별별 애들이 다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몽롱한 쉬는 시간. 교실에는 비현실적으로 따뜻한 바람이 분다.
가장 좋아하는 춘추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껴입고 엎드려 맛있게 잠들려는 찰나, 짝꿍이 내 어깨를 잡고, 노래를 듣겠냐고 묻는다. “…응.” 평소라면 그냥 무시하고 잤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은 그랬다.
그 애는 자신의 무릎을 두어 번가량 쳤다. 나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그 애를 쳐다보다가 홀린 듯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꼬인 이어폰 줄을 풀고, 아이리버 mp3를 켜고,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꽂기 까지의 과정이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NG없이 원테이크로 이어진다. 귀에 닿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던 그 애의 취향.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멜로디. 백 번은 넘게 들은 노래*인데, 너무나도 낯설다.
공기가, 시간이 어긋난다. 이 순간이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직감한다.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아본다. 깜깜한 어둠 속. 나는 혼자. 그래, 이게 편하지. 방심한 순간, 짝꿍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눈을 뜬다. 창 밖의 하늘에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한 점도 없다.
여자를 좋아해선 안 된다고 부정하던 시절이었다. 이건 잘못된 일이야. 고개를 저었다.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어그러지더니 이내 나를 따라온다. 그 애는 시간을 밀어내고 집어삼킨다. 쉬는 시간이 2분 지났다가, 2초 남았다가, 훌쩍 20년이 지난다. 같은 장소에서도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은형아, 그때 내 머리카락은 대체 왜 만졌어? 우리는 왜 손을 잡고 다녔어?
알아서 삭제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사라진 줄 알았는데 한 번씩 복구되는 기억이 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오히려 이제야 선명하게 보이는 마음들. 삶이 괴롭고 모래알같이 거칠고 팍팍할 때 하나씩 찾아 꺼내 마시는, 생수 같은 기억들. 시원하게 물 한 잔 마시고 일어나 보자. 그때 그 노래를 들어보자. 그리고 춤을 추자. 우리는 좀 더 춤을 춰야 해. 좀 더 사랑해야 해.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으니까.
* 노래 : Ryuichi Sakamoto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인물명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