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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루 Oct 16. 2023

어릴 때부터 여자가 좋았다

아, 남자친구도 있기는 했다.


 누군가에게 커밍아웃 하면 '언제부터 여자가 좋았냐'는 질문을 종종 받고는 한다. 글쎄. 나는 언제부터 레즈비언이었을까?


 7살 때, 유치원에서 가장 키가 컸다. 코끼리반에 지켜주고 싶은 여자애가 있었고 자주 그 애를 안았다. 그리고, 보자보자. 좀 수상한 점이 몇 가지 있기는 했다.

 엄마가 입혀주는 분홍색 드레스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금방 벗어던지고, 주머니가 많은 거무죽죽한 갈색 조끼를 자주 입었다. 남자애들의 축구화를 보며 갖고 싶어 침을 흘렸고(나름 떼를 써봤으나 얻지 못했다.), 당시 장래희망은 포크레인 조종사였다. 옆 집 필규에게 공주님 인형을 빌려주면서 그의 로봇이나 레고 장난감을 빌려 가지고 놀기도 했다. 하지만 글쎄, 그것을 레즈비언의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어쩐지 무리가 있다.


 동성애보다 이성애가 보편적인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랑은 주변에 흔히 널려있던 이성애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온순하고 둥글둥글한 남자애와 짝꿍이었다. 준기는 다른 남자애들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리거나, 갑자기 돼지코를 하거나, 시끄럽게 소리 지르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농담을 하면 조용히 웃고는 했다. 그런 준기가 좋았던 나는 대뜸 결혼하자 말했다. 8살, 내가 아는 한 가장 커다란 사랑 표현은 '결혼'이었다. 다행히 그도 내가 싫지 않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학교에서도 손을 잡고 다녔고, 하교할 때에도 손을 잡고 다녔다. 엄마들이 귀엽다며 호들갑 떨던 모습이 떠오른다. 만약 우리가 같은 성별이었다면, 엄마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2학년이 되면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준기와 울며 작별했다.


레즈비언 20년 차이지만, 제법 이성애자 같은 시작점을 가지고 있다. 잘 지내지 준기야? 난 레즈비언이 됐어.(?)




 첫사랑은, 열다섯 때였다.


 목욕탕이 ‘찜질방’이라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였다. 찜질방에 가자는 예진의 말에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 예진과 단둘이 찜질방에 가게 되었다. 이미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굳이 단둘이 가려고 애썼던 것을 보면.


 예진은  친구들 모두와  지내는 친구였다. 교복을 몸에  맞게 수선하고, 낄낄거리며 뒷골목에서 담배를 태웠다. 오빠들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종종 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진은 학교에서 일진으로 통하는, 제법 무서운 무리와도  지냈고 그러면서도 공부를 잘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무던하게 웃기는  정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고,  존재감은 없는 편이었다. 글쎄, 예진과 어떻게 처음 친해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시험이 끝나면 달려가 답을 맞혀보며  답이 맞다고 소리 지르면서 서로의 팔뚝을 꼬집고는 했다. 예진과는 얼굴도  닮았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머리를 기르고 꾸미면 예진의 얼굴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내 마음속 무엇인가 변해가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잘라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희의 말에 덜컥 자른 머리카락 스타일부터가 문제였을까? 어느 날, 예진이 머리를 싹둑 자르고 학교에 왔고 나와 예진은 좀 더 닮은 얼굴이 되었다. 예진은 가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바짝 쫄았다. 애송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태연한척했다. 내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러면 예진은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지나갔고, 나는 멍하니 복도에 서있는, 그런 사이. 그런 사이의 '걔'가 갑자기 찜질방을 단둘이 가자고 한 것이다.


 가족 말고 남의 몸을 본다는 생각에 떨렸던가? 옷을 갈아입으며 우리는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가렸다. 깔깔거리며 하나 둘 셋 하면 수건을 내리기로 했고, 순진하게 수건을 내린 것은 애송이 같은 나뿐이었다. 예진은 꺄르륵 웃으며 뛰어갔다. 저런.

 우리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냉탕에서 물을 튀기며 놀고,(그러면 안됩니다.) 분홍색 반팔 반바지를 상하의 맞춰 입고(찜질복), 어두운 수면실에서 더듬더듬 입을 맞췄다.(이것도 안됩니다.) 그래. 이때부터 확실히 레즈비언이라 할 수 있겠다.


 언제부터 여자가 좋았는지 누가 물어보면 중학교 2학년 때라고 말해야지. 그 전에 좋아하거나 사귄 남자친구들과는 아무런 스킨십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예진 이전'과 '예진 이후'로 나는 나뉜다. 아, 그렇다고 예진이 내 첫사랑은 아니다. 그에게 호감이 있기는 했지만 떠올려 보면 그건 순전히 여성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었지.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해방감이 들었다. 그래. 여자가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 사용된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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