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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신 May 26. 2019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를 읽고

거대한 상업주의 올림픽에서 패자의 기록을 남기다

이 책은 2000년 일본 스포츠 잡지사의 의뢰를 받아서  시드니올림픽 특별 취재원으로 참가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23일간의 시드니 올림픽 기간 동안 보고 듣고 취재한 내용을 그날그날 호텔에서 정리한 글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은 올림픽 그 자체를 성대하고 멋진 대상으로 묘사한 글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오히려 개/폐막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하고 TV에서 자주 보았던 참가 선수들의 호응도 현지에서의 하루키의 눈에는 지쳐 보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가 매우 열의를 가지고 직접 즐기기도 하는 육상, 그중에서도 마라톤이 대해서는 자신의 관찰자 시점뿐만 아니라 감독과 선수의 시점을 인터뷰나 유추를 통해 세세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도 매우 전문적이어서 이 책을 읽고는 육상이  한층 더 복잡계를 통제해야 하는 매력적인 운동으로 보였습니다.

호주의 원주민 문제에 대한 현지에서의 정서를 꽤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데, 특히 성화 최종 주자이자 여자 400m 우승자 캐시 프리먼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지배자와 억압받는 원주민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게 만듭니다.

현재의 호주가 국가로 성숙하는 단계까지 자행되었던 원주민의 분리 통제 정책에 대해 캐시 프리먼이 홀로 고독하게 치러왔던 투쟁이 시드니 올림픽을 통해 백인들에게 조차 큰 울림을 주고 결국 통합의 길로 다가가게 했다는 사실을 하루키는 힘을 뺀 어조로 최대한 시크하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폐막식에 오른 가수가 sorry라고 새겨진 티셔츠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는 것도 하루키의
관찰력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경기장과 선수촌 안팎에서 일어나는 올림픽 주변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도 굉장히 많이 담겨 있습니다.
중요하지는 않아도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묘사는 51세(당시) 소설가의 개인적인 일기장을 보는 듯합니다.

폐막하고 귀국일 선수촌을 나서며 방에 비치되어있는 TV를 몰래 들고 가려다 걸린 한국 선수 3명을 묘사한 글이 있던데 진위여부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진 정서와 사고를 고스란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글로 애독자를 거느린 문장가가 쓴 일반적인 소재의 수필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기대주였으나 남자 마라톤에서 몇 킬로를 남기고 기권한 선수와, 이전 두 번의 올림픽에서 은, 동메달을 각각 받았지만  현역임에도 선발이 못되고 여자 해설가로 참석한 고참 마라톤 선수를 인터뷰한 내용은 책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하루키도 책에서 밝혔듯이 승자가 아닌 어쩌면 패자의 기록으로 마무리한 이 책은,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생각을 더 이어갈 여운을 안겨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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