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시장에서의 번역 산업의 영향력
문화권을 넘나들며 성공하는 콘텐츠는 몇 가지 특징적인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문화의 주도적인 원류를 이루며 별다른 현지화 없이도 폭발적으로 파급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K-Pop이 한국어 가사 그대로 해외의 팬들에게 인기를 끄는 경우입니다.
과거 가수들이 일본이나 미국 등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 가사를 번역해서 발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었지만, 예외적으로 한글 가사로 부르는 우리 K-Pop이 전 세계 시장에서 대성공을 이루는 이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BTS의 한국어 가사 노래들의 경우 현지 팬들에게 소개되자, 그 가사 내용이 진정성 있는 콘텐츠로 각인되며 오히려 한국어 공부의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반대로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대상 국가의 문화적 수용성을 최대한 공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에 진출하는 우리나라 게임의 경우, 배경 원화의 색감에 현지 유저들이 선호하는 붉은 계열의 색상을 강조해서 추가하거나 현지인들이 선호할만한 별도의 캐릭터를 포함시켜 개발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반대로 영화나 드라마, 게임 등이 제작사의 의도와 다르게, 현지 국가에서 문화나 종교적으로 금기시하는 요소를 포함하게 되는 경우에는 판매금지가 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타 문화권으로 소개되는 콘텐츠의 경우, 더빙이나 자막으로 내용 전달을 하게 됩니다. 2016년에 세계적인 권위의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을 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영국인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를 만나 영역되었기에 수상이 가능했습니다. 문학 분야에서는 채식주의자의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도 맨 부커 상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번역 그 자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영상 콘텐츠의 경우에는 OTT가 전달 매체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대역폭이 높은 통신 환경과 다양한 디바이스로 영상을 소비하는 n 스크린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OTT 서비스의 가입자가 과거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상도 전통적인 극장 개봉작과 함께 OTT를 통해 공개된 영화까지 그 시상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코로나19로 극장가와 영화, 드라마 제작 환경이 모두 위축된 가운데, 넷플릭스를 통해 발표된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 등의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여 높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 국가를 아우르는 글로벌 서비스로 발전한 넷플릭스와 같은 OTT는 문화적 경계의 의미를 소멸시키며 하나의 콘텐츠를 광범위한 전 세계 소비 계층으로 실시간 파급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막이나 더빙을 위한 번역의 중요도가 전에 없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가장 빠르게, 보다 여러 언어로 콘텐츠의 출시를 보장하는 번역의 영역에서 속도와 함께 중요한 것이 번역 품질이라고 생각됩니다.
직설적인 단어 치환의 수준을 넘어서서 문화적인 이해를 충분히 반영한 의역까지 요구되는 번역의 세계는 그래서 세심하고 높은 실력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앞서 언급한 채식주의자의 경우에도 훌륭한 창작물과 더불어 번역가의 기여가 맨 부커상 수상에 큰 부분을 기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마블의 인기 영화인 어벤저스 시리즈의 최근작 중 하나는, 중요한 이야기의 변곡점이 되는 대사를 엉터리로 번역해서 극장에 올리는 바람에 전체 줄거리의 이해를 방해하는 역효과가 난 사례도 있었습니다.
OTT를 통한 해외 콘텐츠를 공급하기 위해 번역을 통해 제공되는 자막 서비스의 경우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몰입을 방해하지 않고 원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오역이나 부적절하게 시도되는 의역의 경우 콘텐츠 제작에 쏟아 넣었던 노력들을 마지막 전달 과정에서 무색하게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맹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디즈니 플러스 서비스가 출시되었습니다.
디즈니 오리지널 콘텐츠에 마블 시리즈, 그리고 스타워즈에 픽사,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의 인기 콘텐츠를 망라하고 있어서 출시 전부터 국내 유저들의 높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출시 초기, 일부 자막의 낮은 품질 수준에 대한 불만족으로 인해 유저들의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몇몇의 경우에는 자막의 오역 정도가 매우 한심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어, 디즈니의 의욕적인 한국 진출을 위한 그간의 마케팅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또 일부 콘텐츠는 한글 자막 지원 없이 더빙판만 제공되는 것도 불만 사유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초기 유저들의 실망은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월 23일 모바일 인덱스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하루 동안 해당 서비스를 이용한 유저 수를 의미하는 디즈니 플러스의 일일 활성 이용자 수(DAU)가 국내 출시일인 12일 59만여 명을 기록했으나, 11월 20일에는 42만 명 수준으로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DAU가 출시 초기 마케팅이 집중되는 시기에 오히려 큰 폭으로 감소했다는 것은 실망 고객이 양산되며 유저가 이탈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초기 유저의 이탈을 자막 퀄리티의 문제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실제 시청을 한 사용자들의 부정적 의견이나 언론 기사 등을 통해 자막 문제가 이슈로 전파되면서 많은 부분 영향을 미쳤으리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시장이 통합되는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콘텐츠를 소개하는 번역은 이제 산업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전 세계 통번역 시장의 15%를 차지하는 1위 기업 아이유노SDI미디어의 경우 2018년 손정의 회장이 이끈 느 소프트뱅크벤처스로부터 240억 펀딩을 받은 데 이어 작년에 추가로 1,800억의 투자를 받으며 일약 기업가치 10억 달러 수준의 유니콘 기업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통번역은 A.I의 도입으로 인해 속도와 퀄리티를 모두 향상하는 IT 기술의 영역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아이유노SDI미디어의 경우에도 A.I 기술에 대한 투자를 통해 영상 자막과 더빙 언어 현지화를 총 190개 국가에 무려 80~100개의 언어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운영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처럼 IT 분야의 기술적인 투자가 생산성의 향상을 더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번역은 사람이 주도해서 이뤄지는 전문 영역이며 인적자산이 높은 진입장벽을 이룹니다. 이 기업의 경우 현재 연간 처리하는 자막 번역은 총 60만 시간 분량에 달하고 더빙의 경우는 약 9만 시간 분량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앞서 언급한 디즈니 플러스의 경우에는, 기존 출시 국가 대비 한글 번역에 대한 준비나 투자가 철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빠른 보완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고객의 마음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