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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굴굴 May 04. 2023

'졌잘싸'도 배워야 한다.

승부욕 강한 자의 지는 법 배우기

승부욕이 강한 아들을 키우고 있다.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져 잘하지 못할 건 아예 포기해 버리는 아들이,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뭐든 즐기는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내가 잘해봤자 더 잘하는 인간들은 늘 있다. 남이랑 비교하기보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발전했음에 미소 짓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또 어제의 나보다 좀 못하면 어떤가, 경험치가 쌓이는 것 자체로 좋은 일인데 아들은 이런 이치를 좀체 받아들이지 못했다.

매사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했다.


그런 아이가 최근 아이스하키팀에 들어가 첫 공식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13:0으로 대패.

신생팀이라 경험 많은 팀들에 비해 전력이 빈약했다.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첫 골을 먹던 순간, 아들은 하키스틱을 냅다 던졌다. 우리 아이만 그랬다. 심판에게 한소리 들은 후 아이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하기 싫은 경기를 꾸역꾸역 버티는 듯했다. 승패가 가름 나고 상대 선수들과 인사를 할 때도 아들은 고개 한번 까딱하지 않고 뒤돌아 서있었다.

졌잘싸


부모들은 풀이 죽어 경기장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따듯한 말로 격려했다.  

"수고했어, 잘했어!!"

다들 엄마, 아빠에게 안겨 위로받고 있는 그 속에서 분노에 찬 우리 아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팀 바꿔줘! 이 팀 너무 못해, 골리(골키퍼) 때문에  망했어!"     

심장이 벌렁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나불대는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네가 제일 못했어, 이 자식아!'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아름다운 스포츠맨십은 고사하고, 스스로 배신자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발언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훈육을 한답시고 혼을 낸다면, 아이의 화에 기름을 붓는 거다. 속상한 마음을 가시 돋친 말로 풀어내고 싶어 하는 아이의 심리를 잘 안다.

욱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들에게 말했다.   

"져서 속상하지? 첫 경기는 원래 50:0으로 지는 거야. 그런데 13:0이었어. 너네 얼마나 잘한 건지 알아? 너도 다른 친구들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어서 그렇게 만든 거야. 엄마는 그런 너희들이 너무 자랑스러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이 멋졌어."

그러자 조금 누그러진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다음 경기는 49:0으로 지는 거야? "

"맞아. 그다음은 48:0이고."

"그럼 50 번은 경기를 해봐야 0:0이야?"

"그렇지. 그렇게 계속 부딪혀서 실력을 쌓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집에 오는 내내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집에 도착하자 아이 할머니가 우리 손주 잘하고 왔냐고 반겨주셨다.

"나 13:0으로 완전 졌지."

"아이고 그랬구나. 속상했겠네."

"응, 원래 50:0으로 지는 건데, 13:0이었던 거야. 이제부터 맹연습이다!"


다음에도 지면 분명 또 화를 낼 아들이다. 하지만 그때도 똑같이 가르칠 거다. 지치지 않고 계속 가르칠 거다.

‘졌지만 잘 싸웠다 ‘는 결정적인 순간 아들을 살릴 명제이기에.


 #졌잘싸 #육아일기 #골때리는아들 #아찔한육아 #어린이아이스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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