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의 허상

전략의 탈을 쓴 요약 노트

by Chloe C



우리는 전략 보고서를 쓴다.

정확히는 변명 또는 반성문과 같은 보고서...


정해진 스케줄은 없다.

어쩌면 매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매일, 혹은 하루에도 여러 번 터질 수도 있는

예측 불가능한 요청이다.


대부분은 보고서 뷰티파이(일명 꾸미기 작업)하는 자(중간 보고자)를

과외시키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


중간 보고자는 자신이 선정한 핫한 주제가 떠오르는 대로

퇴근 시간임을 인지하지 않은 채 저녁 7시쯤 “내일 오전까지입니다”라는 메일만 남긴다.

메일 안에는 늘 “이건 윗선 보고에 들어갈 수도 있어서요.”

그 한 마디에 동료, 가족과의 저녁 약속은 사라진다.


부랴부랴 자료를 찾고,

경쟁사 현황을 비교(사실 디스거리 찾기 용도다),

시장 상황과 내부 조건을 엮어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든다.


어떤 제품인지,

경쟁 제품보다 뭐가 나은지,

과거 거래처와의 관계며,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그 모든 내용을 정리해서 공유한다.


우리는 ‘좋은 전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발송 후, 1시간 뒤...

피드백이 온다.

“이건 어떤 서비스인가요?”

“뭐가 좋은 거예요? “

“이거 하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그 순간 허탈하다.

그 질문, 이미 보고서에 다 적어놨다.

한 장도 아니고, 몇 페이지에 걸쳐 도표와 설명으로.


하지만 또다시 같은 질문이 돌아오고,

그에 맞춰 문서를 다시 요약하고,

내용은 같지만 형식을 바꾼 또 다른 버전을 만든다.



“이 숫자 너무 많아요. 합계로만 보여주세요.”

“소수점은 보기에 어려우니까 생략해 주세요.”

“쉬운 말로 단순화해주세요”


그렇게 보고서는 점점 얇아지고,

진짜 전략은 사라지고,

남는 건 ‘보기 좋은’ 문장들뿐이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상위 조직 실무자를 거쳐

결국 최고 결정권자의 책상 위에 또 다른 한 장으로 압축된다.

(결국, 그 한 장은 어떤 내용인지 원 작성자는 알 수 없다.

다만, 실수로 유출된 수정본으로 보고 내용을 유추할 뿐이다)




그 한 장엔

결정도 없고, 실행도 없고,

오직 ‘정리된 척’만 남아 있다.


우리는 전략을 짜는 것이 아니라,

전략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서를 만든다.


읽히지 않을 보고서를 밤 10시에 만들고,


읽지도 않은 피드백에 다시 고치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요약본을 만든다.


그게 조직이 말하는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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