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암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죽음은 항상 가깝고도 쉬웠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옆 침대에 누워있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 갑작스런 신음과 함께 삑삑 거리는 불쾌한 경보음이 울리면 간호사가 뛰어들어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곧 이동되는 침대. 끝이었다. 그 뒤로 청소하는 분이 정리를 하고 새로운 침구를 깐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원래부터 빈자리였던 것 처럼. 그렇게 빈 침대를 보며, 이름도 모를 그분을 명복을 빌어보려고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환자로 채워진다. 좀 전에 그 사람이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일상과 같은 죽음에 익숙해지려 할 때, 이것은 결코 가볍지 않고 일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었다. 바로 보호자들의 슬픔과 고통이었다. 내 침대 옆에서 일어나는 가볍고 쉬운 죽음은 결코 똑같아 보이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온몸으로 표현했다.
젊은 부부였다. 남편이 고통에 몸부림 친다. 곧 마약성 진통제가 투여되면, 아내에게 울면서 살려달라고 하던 남편은 갑자기 약에 취해서 아내에게 욕을 하면서 구타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의 모습이 마지막 몸부림이라 생각했는지 울면서 온몸으로 그 구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서럽게 운다. 맞아서 아픈건지, 뼈 밖에 남지 않은 남편의 몸부림이 이젠 아프지도 않아서 슬퍼서 우는 건지. 그 아내의 절규 비슷한 울음이 그 죽음에 덧데이며 결코 익숙해 질 수 없는 죽음이 된다.
젊어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옆에서 어떻게든 밥 한숟가락 먹이려고 온 힘을 다 한다. 하지만 항암하는 아들은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했다. 보호자 용으로 나온 식판의 뚜껑은 열린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렇게 오늘도 굶는다. 아들은 항암으로 인해 못먹어서 야위여갔다. 어머니는 항암이 아님에도 같이 야위어간다. 아들이 잠들 때 복도에 나가서 어머니는 억지로 서서 컵라면을 먹는다. 못먹는 아들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먹다가도 아들이 뒤척이면, 혹시나 부탁을 못들어줄까 먹다 만 사발면을 식수대에 버리고 다시 들어온다. 그 청년의 죽음에는 복도에서 서서 억지로 라면 한 젓가락을 밀어넣는 어머니의 모습이 묻어있다. 익숙해질 수 없는 죽음이 또 그렇게 새겨진다.
그렇게 나는 고통받는 보호자를 통해서 옆 침대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환자들을 기억한다. 반복되는 죽음에 익숙해지면서 내 삶과 무관한, 아무 영양가 없는 일상적인 사건의 하나로 받아들일 뻔한 죽음들의 무게를 그렇게 배웠다. 그 어떤 죽음도 익숙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고통의 끝은 죽음이니까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살아서 오롯이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어떤 죽음도 익숙해 지거나 숫자 놀이로 표현되서는 안된다.
지금도 무안에서 그 죽음을 소화시키지 못해 죽음 보다 더한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계실 수 많은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