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신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믿었다. 비가 필요할 때는 '비의 신'이 필요했고, 추수할 때에는 풍년을 위해 '풍년의 신'이 필요했다. 아플 때에는 '치유의 신'이 필요했고, 전쟁할 때에는 '전쟁의 신'이 필요했다.
많은 신을 섬기는 것을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필요한 욕망이 생길 때 마다 그저 '기브앤테이크'식의 계약에만 충실하면 된다. 많은 욕망을 통제받을 필요 없이 단순 계약만으로 소유하기엔 오히려 유일신 보다는 다신이 좋다.
또한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마음껏 학살하고, 부를 축적하고, 남의 것을 빼앗어도 괜찮다. 왜냐면 착취당한 민족의 신이 약했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신이 더 강했을 뿐이다. 양심의 가책이나, 인간적인 미안함 따위는 필요없다. 그렇게 종교적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사회. 바로 여러 신들이 공존하는 사회의 매력이다.
그때 이스라엘을 통해 야훼가 등장한다. 야훼는 다른 신들 따위는 돌이나 나무 따위에 불과하다는 식의 합리적인 조롱으로 우상숭배의 허접함을 지적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정말 논리적이며, 이런 하나님이 더 매력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
그들은 알았다. 이 전능한 유일신의 등장은 오히려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방해된다는 것을.
왜냐면 유일신이 나타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형제, 자매, 신의 자녀가 된다. 이렇게 되면 내 욕망과 다른 사람의 욕망이 충돌할 경우 서로의 욕망은 절제되고 조절되고 합의되어야 한다. (십계명)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신이다. 아무리 강한들, 아무리 전능한들, 나의 욕망을 통제시키면 불편하다. 그들은 멍청해서 돌이나 나무 따위를 믿은게 아니다. 나의 욕망을 기도로 받아 줄 수 있는 신. 나의 성공을 위해 상대방을 집어 삼켜도 그것은 너와 나의 승리라고 말해줄 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일신이라고 등장한 하나님은 율법 아래에 그들의 욕망을 통제하려고 했다. 희년이니 기업무름이니 따위의 말도 안되는 논리는 그 동안 맺어왔던 다른 많은 신들과의 계약과 달랐다.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절했고, 이스라엘 백성도 되려 이탈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우상숭배는 단순하게 돌이나 나무를 믿었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아니었다. 다양한 신의 이름으로 욕망을 추구하던 방식을 멈추고, 유일신의 율법 아래에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해야 하는 것. 이것을 거부한 것이 우상숭배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그들은 단순하게 돌이나 나무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상숭배를 안하는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라 칭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사용할 뿐, 각자의 '부동산의 신', '주식의 신', '학벌의 신', '국적의 신', '학연,지연,혈연의 힘' 등. 을 믿으며, 본인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집어 삼킨다.
그렇게 성공한 욕망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 및 합리화 된다. 죽어나가는 자들은 본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다른 신의 자식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자들이다. 욕망은 통제되지 않으며 더 많은 신들을 찾아내서 그들과 거래한다. 물론 이름은 '하나님'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마치 키메라와 같다. 자기가 믿는 신들을 쑤셔박은 끔찍한 혼종이다. 한국 교회는 우상숭배를 위한 만신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러 신자들의 욕망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수 많은 잡신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교회 안에서 뭉쳐진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길 거절했지만, 기어이 인간들은 이름을 만들어 냈다.
키메라 하나님.
차라리 여러 신을 섬길 때가 더 희망적이었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이 분명히 구별되던 시대에는 내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자각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진짜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숭배는 안한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유일신 하나님 아래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욕망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없다면, 내 욕망이 통제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우상숭배 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