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 하조니는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에서 믿음이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고,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신뢰할만 하다 라고 확증된 대상에게 의존하는 행위가 믿음이라고 말한다.
1.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계시하셨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2. 인간은 그 계시를 보고, 최대한 짱구를 굴려서, 이것이 내가 따를 만한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3. 그 결과, 따를만한 것이라면 따르고, 아니라면 거절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고, 구약의 선조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고대 근동의 수 많은 신들 중에서, 공의와 정의를 가르치는 (창18:19)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이 계시가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이런 이성에 기반한 믿음은 신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다른 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신앙을 갖도록 한다.
창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모세의 생명책 거절, 야곱의 씨름, 예레미야의 기도 등.)
그렇다면 맹목적 순종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행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요람 하조니는 여기에 대해서 다르게 해석한다.
이 행위는 '맹목적인 순종',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식의 머리 비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 확신'에 찬 순종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라면 절대 '인신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이성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삭을 바치라는 이 지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자신에게 이 일을 시키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체 무엇을 보여주실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 말씀은 그냥 이삭에게 할 말이 없어서 둘러댄 것이 아니라. 진짜 이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성적 확신에 찬 믿음의 끝에 나타나는 것이 '여호와 이레' 다.
아브라함의 '이성'에 근거한 '순종'이야 말로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신제사 따위는 하나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 요람 하조니의 해석이다.
맹목적 순종이나, 이성에 근거한 절대적 순종이나 겉으로는 똑같은 행위로 보이지만, 칼을 멈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이성'에 근거한 신앙인만 갖고 있다.
'이성'이 없는 맹목적인 믿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던진 순종은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낼 뿐이다.
출32: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믿음은 그냥 믿는게 아니라. 나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을 똑바로 판단하고 믿는 것이다.
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며,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이다. 조건없이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이며, 이 사랑과 희생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자고 초대하신 성령님이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다.
이런 '이성'에 근거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할 뿐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