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주일 설교문
[25.12.21 설교 전문]
<황제의 인구조사와 목자들의 구유>
눅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로마 황제가 인구조사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당시의 인구조사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인구수를 파악하는 통계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백성의 숫자를 세고, 그들이 가진 가축과 재산을 낱낱이 파악하여 황제의 착취를 위한 근거를 만드는 등록 절차였습니다.
마치 노예나 짐승에게 낙인을 찍어 재산 목록에 집어넣는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이 명령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황제의 '숫자' 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황제는 이 숫자를 손에 쥐고 세금을 얼마나 거둘지, 언제 군인으로 징집할지, 국가 사업에 일꾼으로 몇 명이나 동원할지를 마음대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인구조사를 위해 로마가 도로를 닦고, 시스템을 정비하고, 도시를 발전시키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거짓된 평화에 익숙해지다 못해, 그것을 좋아하고 숭배하게 됩니다. 통제가 주는 거짓 평화와 안락함에 속아 넘어갑니다. 누가는 이것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혹시 제가 인구조사라는 단어 하나에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누가는 2절에 더 분명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눅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이 2절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참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된 것은 AD 6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BC 4년과는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가 역사적 연도를 착각한 게 아니냐는 의문도 있었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는 누가가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가져왔다고 해석합니다. 왜냐면 구레뇨의 인구조사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인구조사가 억압의 상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누가는 2절에 구레뇨의 인구조사를 언급하는 겁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에도 언급됩니다.
행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누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는 거짓 평화이며 억압을 위한 통치이지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 대안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오심. 아기 예수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인구조사 같은 엄청난 권력이나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이 인구조사에 반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힘없이 끌려가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실망스럽고, 볼품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왕의 오심이 황제의 인구조사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 볼품없는 현실, 이 끌려 다니는 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로마 황제의 권력이 믿는 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압박하는 것 같지만, 그 서슬 퍼런 권력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황제의 명령이 오히려 하나님의 오심을 돕는 도구가 되고 있었습니다.
인구조사에 무력으로 대항했던 갈릴리의 유다는 실패했습니다. 마치 모세가 동족을 돕겠다고 애굽 관리를 쳐 죽였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느꼈을 그 실망감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은 왜 도와주지 않으실까, 로마는 너무 강한데"라며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말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비록 쫓겨가는 듯해도, 무기력해 보여도, 베들레헴에서 왕이 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누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구유'에 누워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 갔다는 식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태와 누가의 관점은 전혀 다르거든요.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우리는 흔히 여관 주인에게 쫓겨나 차가운 마구간에서 쓸쓸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여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탈루마'는 사실 상업적인 숙박시설보다는 일반 가정집의 '손님방'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의 다른 구절을 볼까요?
눅 22:11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카탈루마)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여기서 집주인에게 "네 집 손님방이 어디냐"라고 물을 때 바로 이 단어를 씁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상업적 '여관'을 말하려 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사용된 '판도케이온(주막)'이라는 단어를 썼어야 합니다.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판도케이온)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이 단어를 올바로 사용해서 마구간 장면을 다시 구성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쫓겨나신 게 아닙니다. 인구조사 때문에 요셉의 친척 집에 이미 손님들이 가득 찼고, 그래서 주인은 가족들이 기거하는 '안방'을 내어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안방 한쪽 아래에 가축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구유가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태어나신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것이죠. 이렇게 이해할 때, 뒤이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신 사건의 의미가 확 살아납니다.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마태복음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합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노동자였습니다.
늘 짐승의 배설물과 피를 묻히고 살아야 했기에 종교적으로 늘 '부정한' 상태였고, 밤낮없이 일하느라 안식일조차 지킬 수 없었습니다. 탈무드나 미쉬나를 보면 "목자는 정직하지 못해 법정 증인으로 설 수 없다"거나 "세리와 목자는 회개하기 힘든 직업이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천하고 부정하고 무시당하는 노동자들에게 천사들이 찾아갑니다. 가장 먼저 복음이 선포됩니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라." 이 말은 목자들, 가난한 당시 서민들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언입니다.
당시 부자들의 집에는 구유가 없었습니다. 가축을 따로 관리하는 마구간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서민들의 집에는 구유가 있었습니다.
"구유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목자들은 평소 자신들의 코끝을 찌르던 가축의 냄새, 짐승의 온기로 채워진 방안의 공기, 아이를 눕힐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푹신한 지푸라기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만약 부자들의 대저택 응접실에 오셨다고 선포됐다면, 먼저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응접실은 모하는 곳인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어쩌면 입구에서부터 제지 당해 들어가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천사들은 여전히 오늘날의 목자들에게 이 소식을 먼저 전하고 있습니다. 밤낮없이 도로를 달려야 하는 배달부들,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냄새나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청소부들,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기에 주일 예배는 꿈도 못 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에게 말합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보라고. 이 선언을 저는 이렇게 이해해 봅니다.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19년 8월 9일 한 60대 청소노동자가 서울대 공과대학 직원 휴게실에서 휴식 중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휴게실은 대학교 계단 아래 좁은 공간에 만든 창고를 개조한 곳이었습니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에어컨이나 창문이 없어 환기조차 안 되서 숨이 막히는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다른 곳도 조사해보니 휴게소도 없어서 청소 도구함에 청소 도구를 치워두고 한곳에서 쉬는 곳도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분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청소 도구함에 지금 누워 계십니다. 라고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분들은 그 선언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압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 새신자 교육이나 제자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이해합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오셨구나. 이 악마 같은 인구 조사의 억압에서도 날 기억하시구나. 이것이 누가가 전하는 아기 예수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디서 아기 예수를 찾고 있습니까? 어디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어디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있습니까? 웅장한 성탄 찬송이 울려 퍼지는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구유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갑시다.
우리는 어디서 구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목자들을 찾아가면 됩니다. 저에게 목자는 함께 있는 치매 어르신들, 몸과 마음이 상처입고 우울한 어르신들 입니다. 그분들이 이해하는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함께 하는 중입니다.
저는 가끔 진지하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해야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분들에게 구유가 무엇인지 전달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라고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이웃 중에 있는 목자들을 찾아가서 오늘날의 구유는 무엇인지 듣고 그곳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탄절이 되길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