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25. 12. 28 설교 전문

by 최희규

(출 33: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 사건을 다들 아실 겁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지만, 모세의 중보로 인해서 일단 위기는 넘겼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계획을 변경하십니다. 그 계획이 바로 3절의 말씀입니다.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보내줄 것이지만,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함께 가다가 또 금송아지를 만드는 비슷한 행위를 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진짜 다 진멸하실 것 같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가능성이 있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거리를 두자는 의미로 읽으면 어쩌면 은혜롭기까지 합니다. 가끔 부부끼리 이혼은 하지 않고 별거를 통해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서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가되,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붙어 계시지 않는 삶.'


솔직히 말해봅시다. 우리의 가나안 땅은 무엇입니까? 안정된 직장, 건강, 자녀의 성공, 평안한 노후, 또한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의 상황에서 기도가 척척 응답되는 것, 이런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걸 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붙어 계셔서, "원수를 용서해라, 희생해라,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라, 정의와 공의를 위해 십자가를 져라" 하는 식의 요구를 하시는 건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땅은 주겠지만 나는 같이 안 갈게"라는 3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서로 '윈윈(Win-Win)'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지켜서 좋고, 우리는 간섭 안 받고 복만 받으니 좋고. 딱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출 33: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모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보다, 설령 그곳이 메마른 광야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친밀함'이 더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그냥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나님에게만 매달렸던 모세는 나중에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합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그토록 고생해서 간 가나안 땅에 정작 본인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거절당하죠.


(신 32:52)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사실 모세도 사람인데 왜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신명기 말씀을 보면 모세도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만하면 족하다"라며 거절하셨을 때, 모세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떼를 쓰거나 절망해서 드러눕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땅은 못 밟아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이 모세에게는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곤란한 일이 생길 때에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약학자 크레이그 키너 교수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다가 성령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일에 대한 나의 뜻을 구하지 말고, 나를 구하라. 그리하면 내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하면서 "이 사업을 해야 할지, 이 직업을 얻어야 할지,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이 학교에 들어가야 할지" 등의 기술적인 것들을 묻습니다. 즉, 까놓고 말하면 결국은 가나안 땅을 가기 위해,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점치듯 묻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가나안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게 아니라, 하나님 그분께 집중하는 겁니다.


이 설교를 듣는다고 '아, 그래 목사님 말씀이 맞아. 하나님을 구해야지'라고 바로 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 그게 잘 안됩니다. 매일 듣고, 반복하고, 노력을 해도, 여전히 삶의 선택의 순간에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기술을 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 그 자체를 구하는 자들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욥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인생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결코 그 시간이 나에게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이 광야의 시간만이 우리들에게 하나님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고백하기까지, 단순하게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모세는 가장 힘이 세고, 권력이 세고, 나이도 젊은 애굽의 왕자였던 시절에,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던 경험이 있습니다.


(출 2: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자신의 동포를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입니다. 독립투사와 같은 행동 아닙니까? 애굽의 입장에서는 살인자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독립투사입니다. 이젠,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애굽을 전복시키든, 모세가 왕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일을 통해서 광야로 쫓겨나고, 그곳에서 40년이라는 시간을 양치기로 보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가장 젊고 직업도 좋고 권력이 있던 그 황금기의 시간을 그냥 허송세월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치기의 40년의 시간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지만, 모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점에서 가장 쓸모없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그 광야의 시간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던 겁니다.


그 40년의 홀로된 시간이 오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이끌어냈습니다. 마치 욥이 그 모든 고난의 끝에서 "귀로 듣다가 이제야 눈으로 하나님을 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을 원하는 그 신앙이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이죠.


(창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소돔이 망하든 말든 나만 아니면 돼"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서 끈질기게 매달립니다. "의인 50명이 있으면요? 10명이 있으면요?" 이것은 단순한 오지랖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니,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아브라함에게도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기도하면서, 전쟁과 기근, 기후문제,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에 대해서 기도할 때에 10분도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원하기보다는 가나안 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나와 상관없는 도시의 멸망을 두고 마치 내 일처럼 가슴 아파하며 기도하는 것, 이것은 억지로 짜낸 의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저절로 생겨난 거룩한 열정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 기도를 흉내 낸답시고, "난 천국 안 가도 돼요"라고 그냥 입으로 중얼거린다고 같은 기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모세는 진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위대해서 백성을 위해 헌신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 보니 진심으로 이 백성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부터 모세에게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런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원리입니다.


로마서에 다들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들으면, "아,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이 나의 건강, 나의 사업, 나의 가족, 나의 학업 등 내가 원하는 가나안 땅을 잘 가게 해달라고 대신 빌어주시는구나"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그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탄식하십니다. "아, 전쟁 중에 있는 저 나라를 어쩌지? 마약에 중독되어 산 송장처럼 서 있는 저 아이들을 누가 돌보지? 노숙자, 가난한 자, 산업재해를 당해 죽어가는 가장들, 생리대가 없어서 신발 깔창을 써야 하는 저 소녀들의 수치심을 누가 위로하지?"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면, 그분의 탄식이 나에게 들려오는 겁니다. 내 문제 해결해달라는 징징거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이 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과 같은 중보기도, 모세와 같은 목숨 건 기도가 우리들에게서 터져 나오며, 의인 10명을 구하는 행위,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저들을 살려달라는 행위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옵니다.


젖과 꿀을 찾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젖과 꿀을 이 땅에 솟아나게 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나안 땅에 가야만 젖과 꿀이 흐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가나안의 젖과 꿀보다, 하나님이 계신 메마른 광야가 낫습니다.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우리는 욥처럼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나의 기도의 제목이 바뀌게 되며, 자연스럽게 의인 10명을 찾는 길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내 이름이 생명책에 지워지면서까지 누군가를 살려달라는 무모한 기도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신앙은, 내가 의지적으로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때, 그분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2026년이 됩니다. 새해에 많은 소원이 있겠지만, 오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하는 2026년이 되길 원한다는 소원을 원하는 성도님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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