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Sep 06. 2020

여름은 물감을 흘리며 뛰어가는 팔레트 같아서

잠시 넋을 놓고 그 액체가 아스팔트 위로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 계절은 더부룩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햇볕도 가득하고 습기도 가득하고 더위와 싸우는 사람들의 짜증도, 과일 트럭에서 나는 참외의 향기도, 초록의 생기도 어질어질할 만큼 가득하다. 이 비만한 계절은 매년 내게 부담스럽다.



그래서 나는 항상 썬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혹시 삼투 현상을 아시는지. 농도가 서로 다른 용액이 있을 때,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용매가 이동해 두 용액의 농도를 같게 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소금물로 치면 안 짠 물에서 짠 물로 물이 이동해 두 소금물이 비슷하게 짜지는 것이다.



나는 여름엔 항상 삼투 현상을 생각한다. 나를 이루는 것들은 너무 적은데, 여름을 이루는 것들은 너무 많아서 내 용매를 빼앗길 것만 같다. 그렇게 되면 난 바짝 말라 소금기만 더덕더덕 남은 쥐포처럼 될 것이다. 그런데 썬글라스를 끼면 그런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다. 썬글라스가 내 용매를 지켜줄 것 같은 기분.



캠퍼스에서 썬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학생은 별로 없다. 그것도 여름 내 꾸준히 끼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나 혼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캠퍼스 잔디밭도 아닌 강의실에서 썬글라스를 낀 그를 봤을 때 말이다.



‘사진의 이해' 수업이었다. 그는 내 자리에서 대각선 앞에 앉아 있었다.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므로 그는 처음부터 눈에 띄었다. 나야 물론 건물에 들어서자 마자 썬글라스는 가방 속에 넣었다. 주목 받는 건 질색이다. 그는 스크린이 잘 안 보이는지 연신 썬글라스를 들썩거렸다. 그러면서도 절대 벗진 않았다. 주변 학생들은 썬글라스맨을 흘긋거렸고 교수 역시 그에게 신경이 쓰여 수업에 집중이 안 되는 눈치였다.



“거기 썬글라스 낀 학생, 여긴 태양이 없는데? 전등이 눈이 많이 부신가?”



기어이 그는 교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가 얼른 썬글라스를 벗고 책에 고개를 처박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의 행동이며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는 쓱 웃으며 등받이에 쭈욱 기댔다.



“빛만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고 생각하세요? 상상력이 부족하신 것 같은데요?”



어우... 저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람. 강의실은 순간 조용해졌다. 저 물건은 어디서 건너온 물건인가. 한국의 공교육 체계 아래서 큰 인물은 분명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싸한 정적 속에서도 능글맞은 미소를 10초 정도 유지하더니 곧 정색을 하고 노트에 뭔가를 끄적였다.



“뭐 때문에 눈이 부신지 모르겠지만… 수업 중에 썬글라스는 벗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교수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썬글라스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썬글라스맨 역시 또 한 차례 싱긋 웃었을 뿐 썬글라스는 기어코 벗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더는 썬글라스를 들썩이지도 않았다.



그는 팔다리가 하얬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점이 많아 보였다. 손목에 하나, 팔꿈치에 하나, 종아리에 하나… 마른 편이었고 앉아 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인 것 같았다. 남자애치곤 머리가 길었고 파마도 했다. 어떻게 보면 중고등학생처럼 아주 어려 보이기도 했다.



대각선 뒤에 앉은 사람으로서 그를 뜯어볼 수 있을 만큼 다 뜯어보고 나니 수업이 끝났다. 나는 건물을 빠져나와 썬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때 뒤에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썬글라스!”



나는 썬글라스를 낀 사람으로서 응당 뒤를 돌아봤다. 돌아보니 내 뒤에는 파마 머리의 썬글라스맨이 있었고, 그 뒤에 교수가 서있었다. 교수는 내가 아니라 썬글라스맨을 부른 것이었다.



“뭐야, 너도 썬글라스 껴? 요즘 학생들 유행인가."



나한테 한 소리였다. 썬글라스맨도 나를 돌아봤다. 나는 튀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었다. 교수의 기억에 썬글라스맨2로 남는 것 역시 싫어 목례만 하고 빠르게 뒤돌아 걸었다. 등 뒤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썬글라스맨에게 뭔가를 해오라고 시키는 듯했다.



“어이 썬글라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곧 슬리퍼를 신고 뛰어 오는 소리가 났다. 탁탁탁탁 하는 소리가 내 뒤에서 멈추더니 어깨를 잡아 휙 돌렸다. 썬글라스맨이었다.



“왜 안 돌아봐?”

“나는 어이 썬글라스가 아니야."

“그럼 뭔데?”

“한미연."

“한미연, 나는 선우식인데 나 좀 도와줘라.”



얼결에 이름까지 말해버린 것도 억울한데 그는 나에게 뭔가를 부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탁보다 더 내 짜증을 돋운 건 함께 있는 우리의 꼴이었다. 마치 함께 쌍꺼풀 수술을 하고 귀가하는 자매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흘깃거리는 것도 같아 나는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고 했다. 썬글라스맨은 주변을 휘휘 보더니 말했다.



“저기 정자에 앉자."



정자에는 ‘무더위 쉼터(한파 쉼터)’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 할아버지들이 모여 바둑을 두거나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이다. 그날도 할아버지 두명이 아담한 나무 판 위에 검은 돌과 흰 돌을 번갈아 가며 두고 있었다.



“너 외국에서 살다 왔니?”

“아니. 순천에서 살았는데?”

“근데 꼭 우리나라에서 안 산 것처럼 그런다.”

“뭐가?”

“수업 시간에 썬글라스 끼는 것도 그렇고. 이런 정자에도 원래 학생들은 잘 안 앉아.”

“나는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거야.”



옳거니. 대학생들 중엔 자기가 특별하다는 걸 알리려고 아득바득 티를 내는 애들이 있다. 예컨대 바쁘지도 않으면서 괜히 약속 시간에 늦거나 교수가 해오라는 걸 안 해오거나 담벼락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거였다. 얘도 그런 부류구나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딘가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정자에 앉아 있었다.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쓰레기통에 뭔가를 휙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물체는 쓰레기통에 못 미쳐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요구르트병이었다. 요구르트병에 남아 있던 베이지색의 액체가 조르륵 흘러 나왔다. 잠시 넋을 놓고 그 액체가 아스팔트 위로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넋이 나갈 것 같은 더위였다. 그때 선우식이 파일 하나를 내 앞에 탁 놓았다.



“방금 교수가 나한테만 과제를 내줬어. 내가 싸가지 없게 굴었다고 복수하는 거야.”



근데...?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도와준다고 한 적이 없는데. 어디 들어가자는 내 얘기를 도움에 대한 수락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는 과제가 뭔지 궁금하기도 해 파일을 슥 들여다 봤다. 파일 속 A4용지에는 딱 한 줄만 써있었다.



‘사진으로 ‘색'을 표현하시오.’



이런 식의 과제를 좋아하는 교수다. 보태서 설명해 주는 일도 없었다. 문제에 대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열려 있고, 창의력을 발휘해 결과물을 제출하라는 식이다. 그래서 아주 고심해서 과제를 내도 성적이 안 좋은 수도 있고,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해서 내도 예상치 못하게 높은 점수를 받는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드문드문 설명해주었다.



“그러니? 야 벌써 도움이 좀 된다. 그럼 여기서 ‘색'이 뭘 말하는 걸까?”



내 보기에 이놈은 누구 시켜 먹는 데 뭐가 있는 것 같았다. 입 바른 소릴 삭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에 답하길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수작에 놀아나고 남이 이용해 먹는 데에 순순히 걸려드는 그런 사람이… 맞았다. 나도 모르게 색이 뭘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색(色)기 할 때 그 색은 아니겠지?”

“그런 것도 아마 학생들 해석에 맡길 거야. 색깔할 때 색으로 풀이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겠지.”



우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꿀'을 강조해 두 번이나 쓴 ‘꿀, 진짜 꿀복숭아’ 트럭에 가 복숭아 하나를 덥석 집어 왔다. 트럭 주인은 운전석에서 곯아 떨어진 듯했다. 우식은 가져온 복숭아를 내 눈 앞에 가져다 댔다.



“이건 분홍색이지? 색깔만 분홍색이 아니라 맛도 분홍색이고, 느낌도 분홍색이야. 이런 걸 찍어 가면 되는 거야?”



나는 이런 식의 돌발행동을 대단히 싫어한다. 자기가 얼마나 대담한지 과시하려고 이러는 건가? 초등학생처럼?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트럭 주인이 쫓아 올까봐 트럭만 연신 흘끗거렸다.



“내가 그냥 가져와서 화났어?”

“그래."

“근데 나 지금 현금이 없어. 빌려주면 안 돼?”



이 자식은 염치가 상한 복숭아처럼 썩어 문드러졌다. 나는 트럭 주인이 나까지 공범으로 몰 게 걱정돼 하는 수 없이 오천 원짜리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 우식은 싱글벙글 웃으며 복숭아 트럭으로 가 값을 치르고 복숭아 네 개를 더 얻어 왔다. 아니 한 개 값만 치르고 나머지는 거슬러 와야지, 오천 원어치 복숭아를 사? 나는 이렇게 속으로도 열불이 나고 밖으로도 열탕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더운데 왜 내가 자릴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가 어이 없었다. 우식은 봉지에서 복숭아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는 이미 팔꿈치까지 과즙을 줄줄 흘리며 껍질 채 먹고 있었다.



“지금 집에 가고 싶지?”

“그래."

“복숭아를 찍을지 말지만 얘기해 줘.”

“찍지마.”

“왜?”

“새롭지가 않잖아. 복숭아, 분홍색. 식상해"

“그러면 첫 번째, 색을 잘 표현해야 한다. 두 번째, 그러면서도 식상하면 안 된다.”

“그래.”

“좋아, 아주 쓸만해.”



본인의 정리가 쓸만하다는 건지 내가 쓸만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우식은 복숭아 두 개를 집어 넉살 좋게 옆에 앉은 할아버지들에게 건내고 정자 옆 수돗가로 갔다. 수돗가라기보다 수도꼭지 하나에 호스가 꼽혀 있는 식이었다. 우식은 팔꿈치 쪽에 호스를 대고 물을 뿌려 끈적한 복숭아 과즙을 씻어냈다.



“식상하지 않기 위해 조금 새로운 질문을 해보자.”

“그래.”

“자, 너는 어떤 색인 것 같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질문이야.”

“왜?”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나는 그냥 나고, 색이랑은 전혀 관련 없지.”

“내가 보기에 너는 좀 걱정이 많고, 또 좀 숨는 성격인 것 같아. 알지? 숨어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회색?”

“내가 언제 숨었어?”

“실제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나서지 않는 거야.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은 거야.”



난 얼마나 쉬운 사람인 걸까. 본 지 몇 시간도 안 된 애한테 성격을 두루 읽혀버릴 만큼 쉬운 걸까. 우식은 여전히 팔꿈치에서 손끝으로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그러느라 반팔티의 소매가 흥건히 젖어버렸다.



“아닌데.”

“이것봐, 솔직하지 못하지.”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러면 말해봐. 무슨 색이야?”

“...뭐… 회색인지는 모르겠지만, 섞여 있는 건 맞는 것 같아. 나는 항상 확실하지 않거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이쪽에 있으면 저쪽에 가고 싶고. 그래서 이쪽과 저쪽을 계속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어. 그렇게 분주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해.”



우식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내 옆에 와 앉았다.



“그러면 그런 건가? 딸기바나나 주스 같은 건가?”

“그렇게 상큼한 느낌이 아닌데.”

“그러면… 아저씨들이 입는 체크무늬 트렁크 팬티 같은 건가?”

“진짜 재미 없다.”



우식은 머쓱해졌는지 정자에 벌렁 누웠다. 처음 정자에 앉았을 때보다 날이 선선해지고 있었다. 아마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 것 같았다. 세상의 색도 조금 바뀐 기분이었다. 새벽의 푸른 빛 위에 아침의 흰 빛이 쌓이고 이제 오후의 노란 빛이 쌓이고 있었다. 잎은 쌓인 빛이 무거워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털었다.



“네 숙제니까 너는 무슨 색인지 말해봐"

"나는… 나는 글쎄… 맑은색..? 맑다기보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깨어있는 색..? 그런 색은 없겠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깨어있고 싶어. 내가 겪는 일들이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퀴벌레처럼 나도 모르게 내 곁을 휙휙 지나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하나하나 잡아서 손에 올려 놓고 살펴보고 뜯어보고 싶어. 그래야만 살아있는 것 같을 거 같아."

"...체력이 좋아야겠어."

"그러게"

"근데 뜯어본다는 게 뭐야 정확히? 문제를 분석하는 거랑 비슷한가."

"아니 그거랑은 좀 달라. 내가 가진 문제는 주로 답이 없어. 그래서 문제는 생각하길 미뤄버려. 서른 뒤로. 서른이 지나면 서른다섯 뒤로 미루겠지. 서른다섯이 되면 마흔 뒤로 미룰 거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미루는 거야. 그런 걸 고민하는 대신에 나는 세상을 더 적극적으로 살고 싶어. 말한 대로 뜯어보는 거지. 아주 다르게 행동해보고,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고, 그걸 갖고 생각을 하고. 남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는 거야. 작은 것까지."



저녁이 되어 선선해지는 게 아니라 비가 올 거라 선선해진 거였을까. 그가 말을 끝내자 거짓말처럼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을 먹은 물감처럼 세상이 점점 진해지는 걸 바라봤다. 우식은 잠이 오는지 아니면 세상을 뜯어보는 그것을 하는지 눈을 감았다. 정자 바깥으로 삐죽 나온 우식의 발등 위로 비가 떨어졌다. 그의 발등은 어딘가 작은 팔레트 같았다.



"살아있고 싶다고?"

"응."

"그럼 살색이 어울리지 않나."



우식은 일어나 앉았다. 그의 눈이 비오는 풍경을 휘저었다. 쓰레기통에서 정자 기둥, 요구르트 병, 클럽 전단지, 나뭇잎, 마침내 내 얼굴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그때 나는 언젠가 이 순간이 소나기처럼 후두둑 생각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래. 살색이 좋겠네."



우식은 반팔티를 벗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그다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식은 정자 끝에 걸터 앉았다. 체력소모가 많은 삶을 살아 그런지 우식의 등은 척추 뼈가 토독토독 튀어나온 게 보일 만큼 살이 별로 없었다.



우식은 자신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내게 주었다. 나는 카메라를 눈에 갖다 대었다. 우식의 등과 비오는 풍경이 한 앵글에 들어오니 우식의 등은 거의 희어보였다. 나는 그게 해가 쨍쨍할 때 찍는 것보다 더 우식의 살색을 더 잘 담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찍어줘."

"응, 그럴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