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Jul 08. 2022

[단편] 하고 싶은 얘기

청량리역까지 가는 길은 무더웠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나를 등 뒤에서 포근히 안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더위를 감당하며 선형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약간 자존심 상했다. 혹시 그가 이 사실에 우쭐하면 어쩌지 싶었다. 하지만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그였다. 2주 간의 여행을 마치자마자 내가 보고 싶다며 청량리역으로 와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만나길 더 원하는 쪽은 그 아닐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여행으로 땀 범벅이 된 상태로 날 만나도 괜찮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관계에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를 따지는 찌질한 습관은 인이 박혀버렸다.


곧 ktx 플랫폼에서 선형이 걸어 나왔다. 땀 범벅은 아니었고 조금 탔고 수염이 자랐다. 그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손을 흔들었다. 선형도 날 발견하고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근처 맥주집에 가기로 했다. 둘이서 볼 때는 늘 술을 마셨다. 카페 같은 곳에서 사람들 사이에 앉아 카페인을 마시며 정신을 깨워서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바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마주보는 것보다 같은 방향을 보며 얘기하는 게 편했다. 우리는 하이볼을 한 잔씩 마시고 이런저런 종류의 맥주들을 몇 잔 더 마셨다. 그동안 선형이 여행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었다. 그는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하고 다녔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이야기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선형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와 그 사람의 생각과 취향에 대해 듣길 좋아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어떤 일을 하는지, 왜 그 일을 하는지, 어렸을 땐 뭘 좋아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나는 잠시 그때를 생각하며 벽에 진열된 술병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선형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수연 씨는 이런 거 싫어하죠? 모르는 사람들 많이 만나는 거."

  "음 잘 모르겠어. 어떨 땐 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역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 건 누굴 만나려고 일부러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다른 사람이 수연 씨한테 다가가는 건 괜찮아요?"

  "그건 괜찮아.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다가오기 쉬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알고 있네요? 수연 씨 처음 봤을 때 '나한테 말 걸지마', '나 부르지마', '아는 척 하지마'... 그런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어요. 사나운 사람은 아닌데, 굉장히 방어적인 사람이라는 느낌..."

나는 탁월한 관찰력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간파당한 것 같아서 뜨끔했다. 선형과 가까이 지내면 자주 간파당하겠지. 왠지 께름칙해졌다. 나는 말했다.

  "너는 그런데도 먼저 말을 걸어줬네."

  "그럴 수록 더 궁금하거든요. 저 사람 뭘까... 대체 뭘까... 그리고 정말로 누구랑 말하기 싫다기보다 그냥 방어기제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그렇더라고요."

  "맞아. 나는 옛날엔 그런 방어기제가 있는 줄 몰랐고, 지금은 알아도 못 고치게 되었어. 그래서 그냥 아,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해."

  "고치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가진 좋은 것의 이면이잖아요."

나는 당신이라는 호칭에 움찔했다. 선형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 숨겨서 혼자 소화하고 혼자 배양해야 하는 것의 이면이잖아요. 깊이 잠수하기 위해 세우게 되는 벽인 거잖아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죠. 제가 너무 쉽게 말했나요?"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위로가 되네."

  "난 당신이 숨기고 싶어 했던 뭔가에 끌렸던 것 같아요."

난 내게 그런 게 있는지 생각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뭔가 있는 척하고 있나. 사실 별거 없는데. 선형은 내게 속은 게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게 과대포장된 삶을 사는 것 같아 약간 울적해졌다. 선형은 계속 말했다.

  "당신은 처음엔 다가가기 어려워도 그 다음은 쉬워요. 쉽다는 표현이 좀 그런가요? 수연 씨도 사실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이해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방어기제는 사람마다 달라도 대부분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어요. 누굴 사귈 때는 그것만 기억하면 돼요."

나는 그가 정말로 뭘 아는 건지, 아니면 그런 척 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안주 없이 거의 술만 마셨다. 선형이 물었다.

  "내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어요?"

  "나 선형 씨 마음에 든다고 한 적 없는데?"

  "내 모든 부분이 마음에 안 들진 않을 거 아니예요.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고 안 드는 부분도 있을 텐데, 그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을 얘기해 달라는 거예요."

  "음... 선형 씨는 좀... 선한 느낌이 있어요. 선하다는 게 뭐랄까... 꼬이지 않은 느낌. 보이는 걸 그대로 보고 들리는 걸 그대로 듣고 생각하는 걸 생각 대로 말하고. 나는 좀 꼬였거든요. 꼬아서 보고 꼬아서 듣고 애둘러 말하고. 나한테는 없는 점을 선형 씨는 가졌으니까. 그래서 마음에 드나봐요. 또 너무 선하기만 하지 않고 적당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것도 좋아요. 무엇보다... 선형 씨 잘생겼잖아. 뭐랄까 정갈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한정식처럼. 슴슴하면서도 바르게 생겼어. 열무김치 올라간 물냉면처럼 생겼어."

선형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사람을 물냉면처럼 생겼다고 하는 게 어디있어요."

그 말을 하고 그는 좀 더 크게 웃었다. 그가 웃으니 오만 원권이 펑펑 쏟아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선형은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선형의 얼굴을 슬쩍 봤다가 눈동자를 굴려 다시 앞을 봤다. 선형은 약간 술이 오른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앞에 놓인 맥주를 홀짝거렸다. 선형은 나를 보며 물었다.

  "인생에 뭘 원해요?"

  "인생에? 뭘 원하냐고? ... 글쎄... 그냥... 약간의 유머가 있는 생활?"

  "거짓말. 정말 그것 뿐이에요?"

  "원하면 인생이 그걸 주나?"

  "음... 수연 씨,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체념한 거구나. 실망하기 싫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럼 안돼? 인생에 뭔가를 바라지 않고, 인생이 행복하길 기대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던데. 인생은 아마 죽을 때까지 지루하고 지독할 거야. 중간중간 행복 같은 게 얼핏 보이겠지만 금방 또 지루해질 거야. 고독해질 거야.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늘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거잖아요. 인간은 원하지 않을 수 없어. 그런 척하는 거지."

  "너는 뭘 원하는데?"

  "좀 진부한데... 진부하지만 사랑이죠. 사랑이 모든 욕구의 끝이라고 봐요. 원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 인간을 가장 깊은 곳까지 채우고 가장 오래도록 구원해주는 것. 직업적인 성공은 이루고 나면 즉시 허망해져요. 돈과 인정은 많이 가진다고 내가 채워지지 않고요. 마실 수록 갈증나고 먹을 수록 허기지죠. 사랑은 그렇지 않아요. 조금만 얻어도 마음이 채워져요. 끝없이 받을 수도 있고 끝없이 줄 수도 있어요. 주는 만큼, 받는 만큼 더 풍요로워져요. 그래서 사랑을 원해요."

  "난 만약에 사랑을 원한다고 해도 어떻게 하는지 몰라."

  "서른이 가까워져도 모르는 거예요?"

  "모르지. 근데 너라면 그때 쯤 알 것 같기도 하다."

  "제가 알게 되면 수연 씨한테도 알려 드릴게요."

우리가 그것까지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까지. 너무 간절하면 스스로를 속이기 쉬운데 선형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다고 믿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나는 늘 이렇게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나는 내 앞에 남은 맥주를 비웠다. 나는 어떤가. 간절히 원하면 도망갈 것 같아서 원하지 않는 척, 하지만 은근히 곁눈질로 사랑을 훔쳐보는 그런 사람인가. 선형의 얼굴을 보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입모양만 보였다. 나가보자는 건지, 안아보자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끔뻑끔뻑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2022년 6월 일기 모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