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된 후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내가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나를 괴롭힌 건 늘 나였다. 다만 전에는 속일 수 있었다. 그 진상 새끼 뒤에 숨어서, 그 상사 새끼 뒤에 숨어서, 그 개새끼 뒤에 숨어서 나를 괴롭힌 건 내가 아니라 저새끼들이라고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새끼 저런 새끼 다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면 확실해진다. 아, 범인은 나구나.
이 문제만 해결하면 행복해지겠지, 이놈만 끊어내면 행복해지겠지 하는 생각은 바보 같은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그놈을 끊어내면 그 문제 뒤에, 그놈 뒤에 숨어 있던 나 자신이 긴 칼을 들고 슬그머니 나타난다. 그러고는 닌자처럼 내 목에 칼을 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어떤 죄책감, 잘난 누군가와의 비교, 재능의 부족, 외모의 부족, 사회성 부족, 실수의 과장 등을 한보따리 풀어낸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일 것이다. 이걸 보고도 행복할 수 있어?
혜영은 여기까지 쓰고 노트북을 덮었다. 침대에 누웠다. 낮엔 침대에 눕지 말자고 결심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결심은 별 힘을 못 쓴다. 혜영은 '씨바 뭐 어쩔 거야...' 하며 베개에 왼쪽 볼을 대고 엎드린다. 혜영은 손으로 머리 맡을 더듬어 아이코스를 집었다. 스틱을 꼈다. 이로써 혜영은 총 두 개의 결심을 어겼다. 혜영은 지긋하게 나이 들기를 원했지만 생활은 지긋지긋해지기만 했다. 그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다 곧 그만뒀다.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심리적으로 독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그 정도는 알아서.
혜영은 서른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마음을 먹고 그랬다기보다 회사를 쉬는 동안 일거리를 하나둘 받아서 하다 보니 몇 년이 지나자 자연스레 프리랜서가 됐다.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생각만 하다가 7년이 지났다. 직장인일 때와 프리랜서일 때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남에게서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삶과 나에게서 고통 받는 (게 확실해진) 삶의 차이다. 프리랜서는 나의 의지를 내가 꺾고 나와의 약속을 내가 배신하고 나의 추측을 내가 비껴가고 나와의 싸움에서 내가 패배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을 쓰고 남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피로는 적지만, 나와 싸우고 나를 어르고 달래야 하는 피로가 있다. 스스로에게 적대적이고 집착적인 감독관처럼 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생활을 몇 년째 하는 걸 보면 혜영은 후자의 피로가 더 견딜만 한가보다.
혜영은 혼잣말도 늘었다. 혼잣말을 하면서 본인을 제일 많이 변호하는 것도 본인이고 닦달하는 것도 본인이고 추켜세우는 것도 본인이고 비하하는 것도 본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혜영은 회사에 다니던 7년은 죽도록 피곤했고 프리랜서로 일한 7년은 죽도록 고독했다. 회사에 다닐 땐 프리랜서를 꿈꿨고 프리랜서로 일할 땐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었다. 왜 늘 시선은 반대편을 바라보게 되는 걸까. 왜 이렇게 스스로에게 비협조적일까. 비협조적인 정도가 아니라 등 뒤에 총을 숨기고 호시탐탐 스스로를 암살할 기회를 엿보는 배신자 같다.
혜영은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자신의 편이 아니니 자신의 편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물론 누구도 타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걸 혜영도 잘 안다. 그런 전지전능함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럼에도 혜영은 자꾸 꿈꾸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긍정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모든 면을. 그녀의 과거, 그녀의 생각, 그녀의 욕망, 그녀가 그리는 미래, 그녀의 비관적인 모습, 그녀의 실수, 그녀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 혜영은 누군가에게 사랑 받게 된다면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랑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길 바랐다. 그럼 자신으로부터 왕따 당하는 것 같은 마음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혜영이 방금 전 '이것만 이렇게 되면 행복해지겠지 하는 생각은 바보 같은 것'이라고 쓰지 않았나. 역시 쓰는 것과 그 사람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혜영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