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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Jan 27. 2019

엉망의 엉덩이

엉망하고 진창한 어딘가

"엉망이네에.."


요즘 내가 미는 유행어다. 내가 실수하고 대리님이 그걸 확인 못 하고 알고보니 팀장님도 딱히 잘한 건 없을 때(이런 경우는 하루에 열두 번 정도 있다). "쌀이 없네.."를 말할 때의 톤으로 아련히 미소하며 읊조린다. 그럼 전부 서로 '니 새끼 탓이다'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는 참화합의 순간.




'엉망이네'는 이런저런 순간에 쓰기 좋다. 당기시오를 굳이 밀었다가 문 바깥의 사람이 어이쿠 하고 뒷걸음질 치는데 그 걸음이 누군가의 발등을 밟아 발등의 주인이 화들짝 커피를 쏟아 뒷걸음질 친 사람의 등짝을 향긋하게 적실 때. 이런 처참한 상황에서도 누군가 "엉망이구만!" 이라고 쾌활하게 외친다면 다들 "흣(이런 소리는 아닐 수 있다)"하며 웃게 될 것이다. '엉망이네'의 힘은 실로 대단해서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상황에서 한 발짝 멀어질 수 있다. 티비로 시트콤을 보듯이. 그럼 시트콤에선 다리가 부러져도 웃긴 것처럼 내가 처한 상황도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엉망이네'는 모래주머니에 구멍을 내는 바늘이다. 쿡 찌르면 모든 것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엉망'은 그 발음이 주는 질감과 유사한 느낌을 가졌다. 'ㅇ'이 세 개나 들어있어 발음하면 입에 곤약젤리가 감기듯 '엉-'으로 시작해 앵앵거리는 '마-아ㅇ'으로 끝난다. 그래서 "엉망이네"라고 말하면 둥그런 'ㅇ'들로 이루어진 푹신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는 감기약에 취해 혼미한 느낌과도 유사하다. 사실 '엉'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거의 다 좋다. 엉뚱, 엉겅퀴, 엉겁결, 엉금엉금, 엉성, 엉엉(물개소리), 엉터리(생고기), 엉덩이...... 어느 하나 정겹지 않은 말이 없다. 엉망은 그 중에서도 탑이어서 엉망이네를 외치고 나면 엉금엉금 기어가는 물개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기분이 된다.




그렇게 흠냐흠냐 취해있다 보면 어느새 '진창'에 와 있을 때가 있다. 진창은 엉망의 엉덩이에서 나온 똥 같은 것이다. 안일한 심정으로 엉망에 몸을 맡기고 있다간 토실한 이응 사이에서 뿌직하고 싸질러져 버린다. 철푸덕 소리가 나면 때는 늦었다. 이미 진창인 것이다. 진창은 그 억양만큼이나 난폭하고 매몰차다. 엉망이 가진 취기나 실소는 없다. 진창은 엄격한 얼굴로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진창이란 걸 깨닫는 순간 서슬퍼런 기운이 등을 훅 스친다. 진창이라는 벼랑에선 누구라도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지 않으면 좆되니까!




회사를 다니기 싫은 건 엉망이지만 진짜로 짤리는 건 진창이다. 연인과 헤어져 얼굴을 묻고 우는 건 엉망이지만 얼굴을 묻고 울 집이 없는 건 진창이다. 접촉사고가 나는 건 엉망이지만 그 차가 포르쉐인 건 진창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엉망이며 진창이 되기 직전인 상태에 달랑달랑 매달려있다. 투덜대면서도 안락하게 엉망한 생활이 계속되길 원한다. 엉망의 엉덩이에 꽉 끼어 소화되지도 배출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변비인의 변 같은 생활도 쉽지만은 않아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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