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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Feb 04. 2019

마음은 탕수육이 아니다

야채곱창도 아니고 제육볶음도 아니다

마음은 탕수육이 아니다. 야채곱창도 아니고 제육볶음도 아니다. 육류나 채소류, 건어물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씹을 수도 없고 침으로 녹일 수도 없다. 포크로 찍을 수도 없고 젓가락으로 집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마음은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고 할 땐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맛이 있는가, 그리고 소화할 수 있는가.



마음은 맛이 없다. 만약 우리가 '남의 덕 보면서 요행을 바래야지'나 '새해에는 술이나 마시고 똥이나 싸야지' 같은 마음을 먹었다면 마음은 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먹는 마음은 '꿈을 위한 일이니 즐겁게 해야지' 혹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참아야 해' 같은 류다. 이런 마음들은 총명탕처럼 몸에 좋은지는 검증되지 않았으나 입에는 확실히 쓰다.



마음은 소화할 수 없다. 나도 한 때 많이 먹었던 마음 중 하나로 '회사 생활은 즐겁다'가 있다. 충성을 다해 모시던 왕이 알고보니 여색을 밝히는 폭군이었다면 충신은 실의에 빠질 것이다. 인생의 8할을 보내는 회사가 알고보니 별로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며 그 우두머리는 회의에서 주로 옹알이를 한다면 회사원은 실의에 빠질 것이다. 그 실의를 감당하고 밥벌이를 계속 하기 위해 마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왕 노동하며 벌어먹어야 하는 인생, 즐겁게 하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은 소화되지 못 했다. 고된 것은 고된 것이었다. 불닭볶음면은 맵고 레몬은 시고 총명탕은 쓰고 회사일은 힘들다. 이런 명백한 사실을 마음 먹기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다면 500원 더 비싼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뭐하러 마시는가 그냥 뜨신 거 먹으면서 차갑다고 마음을 먹으면 되지. 마음은 속여지지 않는다.



마음은 '먹을 것'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 한다. 따라서 먹을 수 없다. 이걸 굳이 먹겠다고 쓴 것을 "달다... 존내 달다.."하며 자기세뇌를 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마음을 잘 먹어서 상황을 타개하기 보다 상황에 조금씩 변화를 줘서 마음이 편하도록 한다. 나는 마음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나는 마음의 고용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 뫼셔야 한다. 마음님께서 흡족하시도록 수발을 든다. 어르고 달랜다.



'어허 오늘도 회의가 좆 같지 않느냐!'


'예예 으르신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요 곧 끝납니다'


'내가 저 올라프 히터 쬐는 소리를 더 들어야겠느냐!!'


'회의가 끝나자마자 달달한 핫초코를 대령하겠사오니 화를 푸시지요'


'흠... 핫초코.. 그래도 10분 안에 끝나지 않으면 또 토라질 것이야!'



일을 때려칠 수는 없으니 이런저런 회유책을 써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상하게 해야 한다. 책상에 깜찍한 다육이도 놓고 단 것도 좀 맥이고 어피치 슬리퍼도 갖다 놓고... 내가 마음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이뿐이다. 행복하거나 슬프지 말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나는 마음의 고용자가 아니고 마음은 탕수육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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