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에 TV에서 미국의 어느 경품왕이 나온 걸 본적이 있었다. 다들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경품으로 받은 것들이었다. 식기, 가구는 물론이거니와 자동차와 집까지도 모두 경품으로 받은 것들이었다. 당시 미국 경제의 최호황기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청소기며 오디오며 텔레비전이며 경품이라 하기엔 너무 좋은 것들로 집이 가득 차 있어서 대단해 보였다.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비슷한 경품왕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 지라 처음엔 역시 미국은 스케일이 크구나 그 정도 생각만 하면서 방송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광경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집 구경을 시켜 주던 그가 취재진을 어느 방으로 인도했는데 그곳은 서재인양 사방이 책으로 가득차고 사무용 책상과 작업선반 같은 것이 위치해 있었다.
"이 곳은 제가 경품을 응모하는 일을 하는 방입니다"
그렇게 멘트를 하고 그는 앉아서 그가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책상에 앉아 왼쪽엔 응모를 위한 매거진들을, 오른쪽엔 참고 도서들을 쌓아놓고 스탠드 라이트를 켜는 그 모습은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흔히 경품왕이라고 하면 우연찮게 뽑히는 것만 생각했지 그것을 위한 노력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에겐 경품응모가 직업 그 자체였다. 책상에 앉아 온갖 매거진을 옆에 쌓아두고 한권 한권 퀴즈를 풀기 시작했다. 십자말퍼즐을 위해 여러 종의 사전을 찾아가며 씨름했고 퀴즈 문제를 풀기위해 백과사전을 동원하며 진지하게 일에 열중했다. 그는 경품 응모를 하기 위해 그렇게 직업처럼 하루에 대여섯시간을 문제 풀이에 집중한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중학생의 나는 머리를 한대 맞은 것 처럼 얼얼한 충격을 느꼈다. 또 흥미를 위한 방송이지만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엄숙함도 느꼈다. 그는 직업의식을 가지고 경품응모를 하고 있었고 그 전문성을 위해 방을 가득 채운 엄청난 양의 책들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이 사람은 재미가 아닌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경품응모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국내 방송에서 내가 본 경품왕들의 모습은 다들 하나같이 운(lucky)에 포커스를 두고 방송에 나왔다. 꿈을 잘 꿨다느니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가 포커스였다. 우리가 운이라 부르는 일을 위해서 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그것을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과연 이 사람처럼 우리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