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효석 Feb 03. 2019

아버지 이야기

이번 설 명절은 해외출장으로 친지들을 뵙지 못하는 관계로 어제 아버지와 따로 식사자리를 가졌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그 자리에서 느낀 바를 기억하고자 기록.


아버지는 올해 75세이신데 아직도 일을 하신다. 동창회 모임에 나가면 유일하게 현역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 부러움을 받고 계신다고 하신다. 구청 소속으로 조경등 시설 관리를 하시는데 이미 이쪽에서는 최고 베테랑이시다.  


간단히 아버지의 역사를 말씀드리자면, 젊어서 회사 생활을 하시다 뒤늦게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IMF가 터지면서 홀랑 망하셨다. 당시 어머니는 긴 투병 생활 중이신데다가 할머니도 모시고 살았고, 친척의 빚 담보도 떠맡게 되는 상황이 겹친데다, 자식 둘이 모두 대학생인 상황이라 우리 가정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사업이 망하시면서 아버지의 동생인 작은 아버지와 같은 직종인 택시 운전을 시작하셨다. 신용불량상태에서 할 수 있는 직업 자체가 거의 없었다. 급여의 절반 가까이를 차압 당하시면서도 열심히 운전을 하셨다. 얼마나 오래 그 일을 하실지도 모른 채 시작하셨고 그저 빚만 갚자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도 없이 일 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택시 운전을 무려 15년을 하셨다. 내 기억으로도 15년간 단 하루도 휴가를 써보지 않으셨다. 그렇게 빚을 다 청산하시고 일을 그만 두셨다.


인생의 황금기인 40대와 50대를 그렇게 보내시고 빚도 다 털고 나니 60대가 되셨다. 편히 쉬실법도 하신데 소일이라도 하셔야 한다고 하셔서 구청의 계약직 시설 관리 업무에 지원하셨는데 운 좋게 선발되셨다. 그나마 평생을 이 지역에서 사셔서 가지고 계신 인맥덕이 있지 않으셨나 싶다. 이것이 아버지 인생의 최대의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내가 가장 부족한 강점을 가지고 계시다. 바로 끈기다. 나는 린(Lean)이니 피보팅(pivoting)이니 하는 핑계로 이일 저일을 바꿔가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적성이지만, 아버지는 늘 이런 식이셨다. 택시운전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시작한 일이 올해로 16년차가 되셨다. 우리 시의 구청을 순회하며 그중 12년을 반장으로 일하는 터줏대감이 되신 것이다. 당연히 최고령 최고참이다.


이 일이 3개월, 6개월, 11개월 단위로 단기계약을 하는 일이고 또 노인 일자리 경쟁률이 워낙 치열해서 정치질이나 로비, 음해, 투서 등이 난무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16년간 계속 재계약을 하며 반장일을 하실 수 있었던 비결을 여쭤보았다. 거기서 내가 배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체 불가능한(irreplaceable) 무기가 있으셨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버지는 각종 나무에 생기는 병충해를 잡는 약품을 배합하는데 최고 전문가라고 하신다. 이것은 배우는 것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인데, 나무 수종과 해충의 종류와 기상환경에 맞추어 여러 종류의 약품을 정확한 비율로 배합하는게 노하우인데 관내에서 이 기술에 있어 아버지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그런 전문 기술이 있으니 함부러 자를 수가 없을 것이다.


둘째, 대인관계를 원만히 유지하셨다.
기간이 오래 되었으니 그간 거쳐간 시청 및 구청 공무원들도 많이 있으셨을게다. 초창기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주무관들이 이제 팀장으로 발령받아 다시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신다. 그걸 기대하고 하신 행동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예전 부터 사람들이 필요할 때 도움을 드리고 궂은 일을 맡아서 하신 것이 자신의 편을 많이 만들게 한 원동력으로 보인다.


셋째, 끈기다.
GRIT에서 말하듯, 성공은 재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여 지속하는 것이 핵심이다. 인생의 중년을 빚 갚는데 다 사용하시고 은퇴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도전이지만 그걸 40대와 50대때 했던 직업보다 더 오래 하시고 계시다. 음해와 투서도 여럿 받으신다고 하시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 내 사회 생활 경력보다 더 오래 버티시며 일을 하시는 것이다.


사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아주 좋지는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가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렇게 인생을 포기하며 일하면서 가정적인 모습까지 기대하는건 무리한 요구이지 않았나 싶다. 여튼 그 노력으로 우리 가정은 해체되지 않고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비록 어머니와 할머니는 빛을 보지 못하시고 먼저 돌아가셨지만 두 자녀인 누나와 나는 대학 졸업 후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가치관에 있어서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은 부자이지만, 적어도 위에 적은 부분 만큼은 아들로서가 아닌 한명의 인간으로서도 존경할만한 부분이다. 나는 그게 억만금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볼 때는 신용불량자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소시민이지만 내게는 재벌 회장보다 더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내가 배우고 공부하는데는 아무 질문 없이 돈을 주셨었다. 대학교 기숙사 앞에 매주 일요일 저녁에 택시를 끌고 오셔서 일주일치 생활비 7만원을 주시고 가시곤 했다. 나는 하루에 한끼씩을 굶고 그 돈을 모아서 중고책을 사 읽었다. 그렇게 공부해서 남긴건 없지만 이런 글 정도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간판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