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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석 Oct 23. 2018

간판에 대하여

나의 첫 직업은 군인이었다. 다들 의외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도 내 적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직업을 택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대학을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운좋게 입학할때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남은 3년 동안 계속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때 우연히 육군 장학생 모집 공고를 봤고 선발되면 졸업때까지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말에 신청하여 졸업 후 총 6년간의 복무를 하는 조건으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덕분에 학비 걱정 없이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첫 근무지는 하루에 버스 4대만 다니는, 과거 삼청교육대가 위치한 곳에 주둔하고 있는 강원도 화천 오음리의 특공부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는 마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전역이후 진로를 학자의 길을 가고 싶어해서 공부에 대학 갈증이 무척 컸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나는 중위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선택한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사이버대학이나 MOOC도 없던 시절이니 그 산간오지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석사를 시작하면서 나는 지식에 대한 갈증때문이었는지 정말 놀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할 때까지 나는 전학기 전과목을 A+ 만점(4.5/4.5)으로 마쳤다. 졸업하면서 성적우수상, 졸업논문상, 도서관장상등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다 받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사실 이런 것들보다도 내가 더 자랑스러워 하는 상이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학교는 규모가 엄청난데 나는 입학한 첫 해에 대학원생 최우수 도서대출자로 도서관장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2년 연속으로 같은 상을 받았다. 자신이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말대신 이 객관적인 지표를 보여줄 수 있는 뿌듯한 결과였다.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전략을 공부한 뒤에도 학업에 뜻이 있어서 그 다음엔 정치대학원에 군사전략을 전공으로 입학했다. 군 협약을 맺은 학과라 다행히 주말에 학업을 할 수 있었다. 이때도 대학원 학생회장을 하면서도 전학기 전과목을 만점으로 마쳤다. 마지막 전역하는 해에는 비록 연구과정이지만 행정대학원에도 진학하여 외교전략을 전공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나름 '전략'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의 공부를 한 셈이다. 이런 노력의 덕분이었는지 중대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방대학교의 객원연구원으로 선발되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통 이렇게 과외 업무을 하면 일은 열심히 하지 않는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곤 한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 증거로 1년에 하나 받기도 어렵다는 장관급 지휘관 표창 및 지방자치단체장 표창을 나는 마지막 4년동안 16개를 받고 명예롭게 전역했다. 이때가 내 나이 만29세 때의 일이다.


전역 후엔 36개국 45개 도시를 도는 세계일주도 했다. 지구의 북반구를 한바퀴 돌며 드넓은 세상에서 살아있는 지식과 지혜를 배우기도 했다. 그 경험을 책으로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서른의 나이에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이후에 내가 하는 일들은 줄줄이 실패했다. 유학도 실패하고 취업도 실패했다. 갈 길이 없어서 창업을 했는데 그것도 계속 실패했다. 어찌어찌 살려고 몸부림 치다가 여기까지 왔다.


비록 내가 예상한 인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드에선 '(학부)비전공자', '특수대학원 출신', '석사출신', '비명문대 출신' 이런걸로 계속 밀린다. 아무리 내가 좋은 스토리를 갖고 인사이트가 있다고 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살아온 인생스토리를 다 이야기 하고 다닐 순 없으니. 경력도 별로 없고 나보다 열살은 어린 서울대 출신, 맥킨지 출신들에게 비교도 안되게 밀렸다. 대학 교수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경영컨설턴트 양성 교육을 하는 지금도 비딩은 지금도 백전백패다. 그냥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간판덕이라도 보라고 사람들이 박사과정 진학을 굉장히 많이 추천했다. 사업가이니 간판을 위한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주변의 많은 추천으로 이번에 모 대학에 한번 지원했다. 결과는 나도 정말 놀랐는데, 불합격이었다. 마침 그날 대학 교수님들 대상으로 연수교육을 강의하고 있다가 들은 소식이라 더 아이러니했다. 이 역시 내가 부족한 탓이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시 편해졌다.


교육업계가 특히 학벌 인플레가 심한데(학석박사에 따라 강의료 단가가 다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자신감이 계속 높아져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 일 것이다. 현장도 강사의 컨텐츠보다 그 강사의 백그라운드를 먼저 보는게 이 바닥이라 난 자꾸 위축되었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대기업이나 외국계기업에 다닌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 프로필을 공개하는 것을 쑥쓰러워 했다.


최근에 모 대기업에서 큰 교육 기획을 협업하기 위해 제안서와 더불어 프로필을 요청하셨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요청자료라 보내드릴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강사 프로필도 따로 없어서 그냥 가지고 있는 이력서를 보내드렸다.


그리고 오늘 그 기업 담당자님들과 미팅을 했는데 테이블 맞은 편에서 제안서보다도 내 이력서만 자꾸 보시는 것이다. 나는 마치 면접을 보는 것 처럼 괜히 쑥쓰럽고 부끄러웠다. 서른살의 나는 세상을 다 씹어먹을 것 같은 패기의 젊은이였는데 사회생활 몇 년 하며 이곳 저곳에서 치이고나니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졌나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 기개의 서른살 청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그분들이 나를 막 칭찬하시기 시작했다. "아 이력서가 너무 훌륭하십니다", "정말 대단하게 살아오신 것 같아요", "정말 인상적입니다". 옆에서 동행한 동생도 "저도 최대표님 이력서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칭송의 릴레이가 벌어졌다.


참 별거 아닌데 그때 갑자기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 그래도 내가 헛살아온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별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이런 작은 칭찬에도 찡했는지, 정말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있었나보다.


그러고 보면 명함 한 장, 백지 프로필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들도 다들 내가 보여주지 못했던 이력이 아닌 '나'라는 사람을 보고 일을 같이 해온 것이 아닌가. 그만큼 인정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또 헛 산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의 많은 지인과 팬들 중에 내 이력서를 보고 나를 좋아해주는 분은 단 한 분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통하고 '나'라는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많이 반성했다. 교육공학을 공부해보니까 알게 됐다. 학교에서 배우는게 10%라면 일하면서 배우는게 90%다. 열등감에서 빠져나와 일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명문대 박사생들도 결국은 공부 마치고 취업하는게 목표 아닌가. 난 그 길을 fast-track으로 먼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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