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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석 Apr 07. 2020

진짜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2011년 이맘때쯤 나는 북경에서 출발하여 몽골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있었다. 일주일을 내내 달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열차 노선이다.

나와 같은 배낭여행자를 제외하곤 그 열차의 승객 대부분은 비행기를 탈 형편이 되지 않는 몽골인들이었다. 내가 가장 저렴한 6인실 객실에 오르자, 운좋게도 몽골인 룸메이트 한 명 밖에 없어서 둘이서 쾌적하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사를 하고 서로에 관한 이야기, 여행에 관한 이야기만 밤이 어두워질때까지 나누었다. 그래도 시간은 길었다. 한시간을 아무말도 안하고 침묵하던 고요함도 지나고나면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차창에 햇빛이 들어오자 그는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긴 여정이 남은 나를 위해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더니 여행중에 심심할때마다 보라며 영화와 드라마 파일을 USB에 담아 내 노트북에 옮겨주었다. 꽤 많은 양이었는데 나도 그 정도면 시간이 지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그와 헤어졌다.


문제는 그날 점심이 되기도 전에 발생했다. 노트북 충전기의 전원과 열차의 전압이 맞지 않아 충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는 고사하고, 열차에 오른 이튿날째 나는 모든 전기장치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진짜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던 나는 혼자 하루종일 창문밖을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여독을 풀고 일정을 정리하느라 하루가 지났다. 그 다음날엔 하루 종일 한반도보다 넓은 바이칼 호수만 바라봤다. 그래도 여정의 절반도 지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머릿속에 삼십년 넘게 묵혀있던 오래된 생각들을 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내 과거를 꺼내 다시 조립하고 미래를 구상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명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나는 마치 시간과 정신의 방을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외부의 모든 정보를 차단한 채 일주일 동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다행히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열차에서 내내 노트북이랑 스마트폰으로 영화나 만화책만 보고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냥 평범한 휴가와 똑같은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래서 충전을 하지 못했던 그 상황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도 나는 여행을 하며 기록을 남기는 목적외엔 전자기기를 피하고 오롯이 나의 경험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36개국 45개 도시를 돌고나서 나는 실로 커다란 인생의 전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지만, 자택에서 격리하던 중에 불현듯 그 시절의 경험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멍하니 있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마치 생각의 디톡스를 하듯 머리속에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있던 그때에 비해 더욱 스마트폰과 디지털기기에 중독되어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에 갈증을 느끼는 것 같다.


일감은 여전히 예전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기간동안 스스로 성찰하며 내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된 것 같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에서 이제 또 하나의 정차역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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