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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칸방

by GQ

단칸방에 온 가족이 살았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의 일이다. 어린 나는 그게 불편한 건지도 몰랐고, 다만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부모님이 통 허락을 안 하셨다.

-어린이라는 세계 中-


낮은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여러 개의 방이 길게 붙어있는 그런 집이었다. 일명 자취방. 보증금 30만 원에 월 10만 원짜리 방이었다.

낡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그냥 합판이 오래되어 낡은 건지 모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무렇게나 대충 시멘트를 부어 만든 기울기가 맞지 않는 반 평 남짓한 공간이 나온다. 사방이 시멘트로 싸여 있고 투박한 미감을 적용한,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그 콘크리트 카페 같은 느낌이라고 해두자.

현관 겸 주방 겸 욕실을 겸하는 공간이었다. 한 켠에 빨간 다라이와 무릎 높이의 수도가 있었다. 그리고 다라이엔 늘 절반 이상의 물이 채워져 있었다. 일본 장어집의 타레 소스처럼 다라이 안의 물은 늘 예전의 물이 남은 채 새 물이 첨가되어 역사가 쌓여갔다.

왼쪽엔 습기 때문에 문 틀어져 제대로 닫히지 않는 싱크대가, 그 위에는 시골집에서 가져온 녹이 슨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었다. 중앙엔 댓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신발을 놓는 현관이었다. 아 참, 이 공간을 소개할 때 빼먹으면 안 되는 게 하나 있는데 옆 방과 이웃하는 벽에 뚫린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구멍이다. 보일러를 방마다 설치하는 게 비용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주인 할머니께서 방 두 개당 하나의 보일러를 설치한 거다. 온도조절기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주방이자 현관이자 무려 욕실이기도 한 공간에 구멍을 뚫어 양쪽 방 서로 정답도록 만들어둔 거다. 성인지 감수성, 성적수치심 따위의 단어가 그 시절에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개념 자체를 탑재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옆 방엔 전주대학교에 다니는 잘생기고 키 큰 형과 그 형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형이 함께 살았다. 형들은 꽤 선한 사람들이었음에도, 형들이 집에 먼저 들어와 보일러를 일찍 켜거나, 수업이 없는 아침에 늦잠을 자며 보일러를 끄지 않을 때는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특히 기름이 다 떨어져 기름통을 채우는 날이면 더 그랬다. 한 드럼을 가득 채우면 옆 방과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는데 부당하단 생각에 앞으론 온수를 아끼지 말고 써야겠다 다짐을 하곤 했다.

현관(?)에서 댓돌에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보자. 변색된 창호지가 겨우 붙어있는 격자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이 하나 있는데 이 공간 역시 복합공간의 개념이 반영된 곳이다. 거실이자 공부방이자 드레스룸 등을 겸하고 있었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에 방 구들장마저 높아서 똑바로 서면 천장에 머리가 닿았다.

구색을 갖추기 위한 창이 하나 있었는데 창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중세시대 영화에 나오는 감옥에 겨우 나 있는 조그마한 창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환기도 안 되고 뜨거운 공기가 올라갈 천고가 충분치 않다 보니 여름이면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슬레이트 지붕에서 달궈진 열은 그대로 자취방을 데워 양머리 수건을 쓰고 식혜를 마시면 딱이었다.

방 크기는 주차장만 한 공간이었는데 그 안에 냉장고와 책상과 비키니 옷장이 있었다. 만약 이 집을 지을 때 설계라든지 건축 따위의 단어가 오갔다면 진짜 양심 따윈 없는 사람이었을 거다.


화장실은 더 가관이었다. 자취방이 열 개가 넘었는데 화장실은 공용으로, 그것도 야외에 딱 두 개 있었다. 그 두 개의 화장실 역시 주인 할머니의 절약 정신을 투철하게 반영한 설계였다. 두 화장실을 구분하는 벽을 천장까지 쌓지 않고 공간을 두어 딱 하나의 전구를 달았다. 콩 한 쪽 나눠 먹는 심정으로 옆 화장실과 백열전구를 공유했다. 문제는 내가 똥을 싸고 있는데 인지하지 못한 옆 칸 이용자가 밖에서 불을 끄고 나갈 때다. 오로지 스스로에 대한 믿음 하나로 손을 뻗어 적당한 거리감과 스냅으로 뒤처리를 해야 했다. 매번 성공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빼먹은 게 있는데 그 자취방에 혼자 산 것이 아니라 누나랑 같이 살았다는 거다. 대학생이었던 누나는 그 방에서 나와 함께 지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땐 내가 불편하다거나 누나가 불편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종종 미안할 때가 있다.

누나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욕실을 이용해야 했고, 단칸방에서 남동생과 지내야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불편할 일 투성이다.

한번은 잠을 잘 때 머리맡을 돌아다니는 쥐가 너무 무섭고 징그러워서 찍찍이를 사다 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쥐가 돌아다닌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쥐가 잡혔다는 사실이었다. 쫄보에 에겐 남매였던 우리는 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심층 토론을 했던 것 같은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잠이 드는 바람에 밤새도록 찍찍거리는 쥐의 비명을 백색소음 삼아야 했다.

다음날이 되어도 마땅한 처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찍찍이를 반으로 접어 쥐를 시각적으로 봉쇄했다. 큰 맘을 먹고 꿈틀거리는 찍찍이를 집게로 집어 들고 농사를 짓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란 논에 던져 버렸다. 아마 아사했을 것이다. 며칠 동안 고통 속에 죽어간 쥐가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딱히 그때는 불행하다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단칸방이라도 있어서 행복했고 친구들을 불러 노는 것도 창피하지 않았고 건넛방 여고생이 마당에 널어둔 누나의 옷을 훔쳐가는 것도 그럭저럭 이해가 되는 시절이었다.


가난한 줄 모르면 가난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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