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무 살, B는 서른 살이었다. 지금 보면 서른도 한참 어린 나이 같지만, 나이란 상대적인 법이라 당시 B는 엄청 어른 같았다. 아니, 나이의 상대성을 차치하더라도 그는 그냥 어른 같은 사람이었다. 열두 살의 진희가 세상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누군가는 세상을 더 빨리 깨우치는 법이다.
스무 살의 나에게 B는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며 『새의 선물』을 건넸다. 종종 자기소개 취미란에 딱히 쓸 게 없어서 전 국민의 취미라는 "독서, 음악 감상" 따위를 써놓긴 했지만, 제대로 된 독서를 해본 적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새의 선물』은 이야기의 힘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었지만, 나에겐 유년기를 연상케 하는 과거의 철저한 고증이 더욱 흥미로웠다. 변소와 쥐, 똥과 고무신, 뒤안과 차부, 그리고 그 시대의 야만스러운 낭만들 혹은 낭만스러운 야만들.
흥미롭게 읽은 부분들은 모서리를 접어 표시해뒀었는데, B에게 책을 돌려주자 전에 없던 정색을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접지 않아." 무안함이 깃든 깨달음 같은 것을 느꼈는데, 그 후로 나는 무려 25년 동안 책 모서리를 접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 책의 원형을 유지하려는 강박 같은 것이 생겼다.
요즘은 그 원형에 집착하는 마음이 무용하다 생각되어 종종 모서리를 접는다. 그런데 어쩐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 실컷 접으면서 배덕감이나 느껴보려고 했는데, 사람은 쉬 변하지 않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