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딱히 연예인에 열광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다 멋지고 이쁜 사람들이니 보기 좋다 정도였다. 그러다 우연히 중학교 점심시간 친구가 보여준 한 락밴드의 콘서트 비디오를 보는 순간, 내 생애 첫 최애라는 것이 생겼다. 그 락 밴드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밴드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친구가 어떻게 그 비디오를 손에 넣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일본 음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일본 가수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일본 대중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감기와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랑까지는 아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이 생겼음을 어머니는 단박에 알아차리셨다.
어머니께서 저녁 준비를 하는 시간은 내겐 그날 집을 나선 후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본 가수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빠질 수 없었다. 일본 가수를 좋아하고 일본 문화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 금기시하는 것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죄책감 아닌 죄책감이 들었다. 혼내시거나 뭐라고 하실까 봐 살짝 그 얘기만 빼고 말할까도 했었지만, 그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가감 없이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어머니는 별 다른 말씀이 없으셨고 MTV에 나오는 밴드의 뮤직비디오 같이 봐주셨다.
그러던 중 드디어 일본 문화 개방이 되고 내가 살던 동네 영화관에 첫 일본 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것이 바로 러브레터였다. 합법적으로 영화관에서 일본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가고는 싶지만, 돈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선뜻 먼저 말씀해 주셨다.
"영화 보러 갈래?"
그렇게 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갔다. 극장 내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켜지는 순간부터 다시 극장 내 조명이 켜지는 순간까지, 2시간 남짓동안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초집중력을 쏟아냈다. 오죽하면 나오고 나서 사람들 하는 말이 죄다 일본어 같이 들렸을 정도였다. 그렇게 러브레터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에 등극했다. 영화 자체로도 훌륭했다. 내용이며, 영상이며, 음악까지.
그러나 러브레터가 인생 영화가 된 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화 러브레터가 10대 시절 애틋한 첫사랑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어머니가 딸에게 전하는 러브레터이기 때문이다. 딸이 좋아하는 게 뭔지 귀담아 들어주고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난 영화 러브레터를 볼 때마다 괜히 울컥한다. 살면서 누군가가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주었던 적이 있던가?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애정의 편지를 러브레터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love letter. 말 그대로 사랑 편지니 굳이 남녀 사이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항상 러브레터를 받기만 했다. 이제는 내가 러브레터를 쓸 때이다. 간지럽고 어색해서 안 썼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 쑥스럽지만, 거창하진 않더라도 한 두줄이라도 어머니께 러브레터 서봐야겠다. 지금 함께 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닿기를 바라며...
어머니, 잘 지내시나요?
오늘도.. 당신이 그립습니다... 아주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