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AKE Mar 01. 2019

시안 작업이 필요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

시안 작업이 불편한 디자이너들에게

작년에 결혼을 했다. 내가 결혼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한 것은 식장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사실 마음에 드는 식장을 고르고 예약을 하고 그 자리에서 양측 부모님께 통보아닌 통보를 드렸다. 그만큼 내 결혼에 있어서 식장 선택은 중요했다. 결혼을 준비하기 전, 이곳저곳 오가며 마음에 담아둔 베뉴는 드레스가든이었다. 결혼식장을 고르는데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주 마음에 드는 무엇이 있는 곳보다는 내 눈에 거슬리는 요소가 가장 적은 곳이었다. 베뉴의 이름이라던가 건물 외형, 간판, 축지, 홀까지 들어가는 동선부터 화장실 픽토그램까지 확인했다. 이미 완성되어진 공간을 고르는 것이고 결혼식이라는 행사 특성상 장식적인 것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중 최대한 '내 눈에 거슬리는 불필요한 요소가 없는 곳'을 기준으로 잡았다. 결혼식에 온 하객들에게 우리가 전달하려는 경험 이외의 다른 자극을 가급적 받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였다.


드레스가든은 이미 알고 있던 곳이었고 천고도 높고 불필요하고 자극적인 장식들이 없어서 예전부터 결혼을 한다면 이곳에서 해야지 하고 마음에 두었던 곳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부분의 조건을 만족했지만 100% 완벽하게 마음에 든다는 확신은 없었고 가장 중요한 신부에게 내 생각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우선 서울에 있는 식장 리스트를 추려서 엑셀 시트에 정리했다. 인터넷 사이트와 후기를 뒤져 인테리어, 편의성, 접근성, 가격, 식사, 주차 등을 항목별로 우선순위를 정해 따져봤다. 100군데 정도 베뉴 리스트가 만들어졌고 그중에 다섯 군데를 취합해 직접 다녔다. 후보는 '드레스가든', '세상의 모든 아침', '글래드호텔', '제이글랜하우스', '라마다호텔'이었다.


많은 것들을 따져보고 고민했지만 결국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드레스가든으로 결정했다. 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베뉴들을 따져보고 살펴봤을까? 첫 번째는 드레스가든이 내 마음에는 들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왜 마음에 드는지 그 이유에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비교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좋음과 나쁨의 기준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베뉴를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드레스가든을 골라야 하는 기준을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행위가 되었고, 각 베뉴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쳐내다 보니 내가 선호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생겼다.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정이고,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일정과 비용을 따져가며 내 기준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양측 가족과 신부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내게는 최고로 좋은 것을 고르는 것보다는 필연적인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좋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는 일련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 기회가 된다면 따로 꼭 정리하고 싶다)


시안을 작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명확한 방향 설정, 프로젝트 맥락의 이해, 철저한 사전조사, 검증된 이론 등으로 나 스스로를 포함한 타겟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해 의사결정권자와 협업부서를 설득할 수 있다면 시안은 한 개만 있어도 충분하다. 하지만 뭔가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를 때, 그래서 그것이 왜 좋고 왜 이것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설득할 수 없다면 비교 가능한 기준을 잡을 수 있는 시안 작업이 필요하다.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님 예전 인터뷰에서 시안 작업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를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을 읽었을 당시에는 막연하게 '와! 멋지다. 나도 시안은 한 개만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여기에는 '나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거나… 긴가민가할 때…'라는 전제가 붙는다. 나는 의사 결정의 주체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시안 작업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검은색이 있어야 회색이 밝다고 느낄 수 있고, 흰색이 있어야 회색이 어둡다고 느낄 수 있다. 그 비교 행위와 기준이 없다면 회색은 밝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어둡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 생각과 견해의 차이를 서로 좁혀가는 과정이 시안이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떠나서 하나의 시안으로 설득하는 것이 제일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디자이너 관점으로 본 영화 ‘말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